[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3) 고백하기
이번부터는 키에르케고어의 <고난의 복음>에 실려 있는 일곱 개 강화 중 마지막 강화인 “고난당하는 자가 담대한 확신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능력을 빼앗고, 그 능력으로 능욕을 영광으로, 파멸을 승리로 바꿀 수 있는 기쁨”을 나눌 차례다. 이 강화는 사도행전 5장 41절을 본문으로 하고 있다.
“그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겼기 때문에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났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구절을 다루면서, 고백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사도들이 핍박을 받던 시절부터, 초대 교회의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대중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를 고백하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하지만 또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의 이익에 대한 관심으로, 세상 앞에서 자신의 사랑의 대상을 고백하는 데 있어 비겁하고 비열하게 두려워하는 것, 이것은 확실히 사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럽고 가장 경멸적인 것들 중 하나이다.
물론, 성서는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요구한 적이 없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사람 앞에서 필수적으로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도들이 핍박을 받았던 저 시대에 대중 앞에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일 뿐 아니라, 기독교를 선포하는 일과 같았다. 이 고백은 내면의 강한 충동으로, 저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중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전했다. 그 결과 채찍질을 당하고 그 이름으로 인해 능욕을 받았지만, 오히려 이런 능욕을 받을 자로 여기며 기뻐했다.
이것은 기독교 주위에 있는 온 세상이 이교도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면에서 세상 앞에서 그의 믿음을 고백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고백이 존재했던 방식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또한 고백하기 위한 자발적 준비와 열정이 있었다. 그런 고백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몇몇을 선정했고, 그들이 순교자처럼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은 아니지만 고백의 많은 위험 가운데 시험을 당했던 그 사람들을 ‘고백하는 자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당시에 고백은 무조건적으로 누구에게나 요구됐다. 왜냐하면 세계가 원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범죄자처럼 다루기 원했다. 그때 (몇몇 교부들이 명확하고 날카롭게 설명했듯,) 이교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고 고백하길 원했다. 그러나 범죄자들처럼 그들의 죄를 고백하기 원했던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교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기독교가 의기양양하게 승리한 지금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은, 요구 조건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결코 아닌 지금은, 그 상황이 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질문의 여지 없이, 최고의 요구조건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대교회 시대에는 고백하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면, 요즘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중 앞에서 고백한다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는 일이 되었다.
이방인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기독교를 선포하는 것과 같다. 그런 종류의 고백은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지 않다. 곧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그런 판단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살아갈 때, 혹은 모두가 자신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살아갈 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를 선포하는 것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고백을 들은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에서 배웠고, 자신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백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만 하는 것을 심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심판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경솔함과 부주의를 가장 관대하게, 그들의 위선에 대하여는 가장 엄하게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두 상황은 완전히 다르고, 구별하기에도 쉽다. 왜냐하면 한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였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정확히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 기독교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역시 기독교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둘러싸였고, 따라서 더 탁월한 정도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날 믿음의 싸움은 영적으로 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적과 아군이 아주 분명했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적과 아군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은 내부에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인 척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고백에 어떤 특별한 위험도 없다. 고백도 아주 쉽다. 하지만 고백하는 자들에 대한 어떤 존경도 없다.
오늘날은 이 고백이 진실한지 테스트 받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래서 키에르케고어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자기 시험을 위하여>에서 성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후 13:5)!”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