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5) 승리
승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누군가 겨루어서 이기는 것이다. 운동 경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군가 싸워 이겨야만 한다. 패배는 수치요, 굴욕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 불의와 싸워 이겨야 한다. 이때, 불굴의 의지로 불의와 맞서 싸워 이길 때, 이것이 승리다.
하지만 이런 승리에 대한 관점으로는 우리가 나눌 사도들의 모범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이미 파멸된 자들이었고, 망신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다(행 5:41).”
아마 이들은 전체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전체 세상이 그들을 향에 등을 돌렸고, 결국 많은 사람들은 순교하고 말았다. 세상의 불의의 힘과 비교할 때,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너무 나약하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
이런 승리의 관점으로는, 소설 속 주인공 장발장 정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악법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용서를 실천한 사람이다.
하지만 악법에 저항하기는커녕,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소크라테스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음을 선택한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죽는다.
“크리토여, 우리가 이스쿨라피우스에게 수탉 한 마리 값을 치르지 않은 것이 있다네. 잊지 않고 갚아주기 바라네.”
이것은 소크라테스에게는 승리였다. 결백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는 것, 하지만 재치 있는 말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것은 승리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아마 세상에서 최고의 승리라면 이런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죽으면서 적들을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생략되었을 때, 이것은 놀이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참여한다면, 이야기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사도들의 모범을 나눌 차례가 되었다.
믿음의 비밀이란 이런 것이다. 곧 온 세상이 파멸이라 부르는 것이 승리라는 것, 온 세상이 망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 하지만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견딜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승리와 사도의 승리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사도들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사도들은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다.
왜인가?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과 화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망각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사람들과 싸우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은 그들의 관심 밖에 있다. 사람들의 행동은 기껏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험하는 기회로서 작용할 뿐이다. 오직 이것에만 사로잡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산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잡혀갔을 때, 뭐라 말하는가? 그는 대화하면서 공격했는가? 아니, 오히려 그의 말은 부드럽고 달래는 듯 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바울은 고난당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싸우지 않는다. 그는 유일하게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그들의 모든 능력을 집중시켜 사도를 공격할 때, 세상은 동등한 상태에서 그와 싸워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사도는 지속적으로 제3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단순하고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것, 그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보라. 인간적으로 말해 결백하지만 사형선고를 받는 것, 그러나 그의 입술로 재치 있는 말을 하고 죽는 것, 그것은 자랑스러운 승리이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승리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최고의 성취일 수 있다.
그러나 유의하라. 하나님이 생략되었을 때, 전체 인생과 그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장면들이 근본적으로 놀이일 때,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놀이에 참가하지 않으셨으니까, 하나님이 참여하신다면, 그때 인생은 진지해진다.
그렇지만 사도는 다른 모든 것을 생략한다. 다른 모든 것은 망각한다. 다른 모든 것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이것이 우리가 순교자들로부터 이런 겸손한 말을 듣는 이유이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생각해 보라. 이런 말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의 모든 악의와 무시에도 무관심하다. 그는 그들을 이기고 승리할 것을 구하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이 더 강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도 않았다.
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최후에 순간에서조차, 그가 올바르게 그의 과업을 완수하고 있는지에 대한 어떤 두려움과 떨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런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던 것이다.
보라, 순교자 주위에 성난 군중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이 사건이 자신들과 순교자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 최후의 순간에서조차 그를 비웃고 고난당하는 자로부터 울부짖는 소리를 듣거나 경멸적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거기에 다른 누군가가 참석했다는 것은 군중들의 눈에는 숨겨진다.
그러나 순교자는 오직 하나님만 보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은 마치 착각에 빠진 군중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진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순교자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고난당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 말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놀라운 무언가를 한다. 그는 담대한 확신의 도움을 받아 언어를 변화시킨다.
언어의 아무리 고상한 구절도 이 순교자의 결백을 서술하기에 부적합할 때, 이 문제에 대해 인간적으로 말해 이 순교자의 보상(reward)도 서술하기에 부적합 할 때, 왜냐하면 그는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만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무엇이든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사람들과 상대했던 회계장부를 찢어버린다. 그들의 모든 잘못은 그들에게 맡기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머지 우리들은 선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반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는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이 놀라운 언어, 이 놀라운 고상함이여! 광기의 정점에서 이런 담대한 확신이 있을 수 있다니!
그러나 독자,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세상이 조금만이라도 우리에게 반대한다면, 우리는 징징거리며 불평한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바쁘고,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고 싶다면, 결과적으로 사도의 이 말을 광기라고 부르는 데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난 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다.” 그들은 실제로 기뻐했다. 그것은 세상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의 거짓된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실제로 기뻐했다.
진실로 어떤 소녀도, 사도들이 채찍질당한 날만큼이나, 하나님과의 약혼식을 거행했던 그런 수많은 날만큼이나, 그녀의 약혼식을 거행했던 날을 기뻐하지 못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