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선교칼럼] 바벨 콤플렉스
필자는 시간을 내어 자주 현장을 찾아 나선다. 러시아 내륙 지방의 끝없는 길, 앞뒤로 차가 보이지 않는 눈이 쏟아지는 자작나무 숲길, 몇 시간씩 달리면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복음송을 부를 때 바로 이것이구나, 함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자동차로 한 번 출발하면 기본이 왕복 1,000km이다. 서울에서 교회를 섬겼을 때, 진주까지 내려가면 천리 길이었다. 계획을 세우고, 여러가지 짐을 챙기고 결심을 해야 갈 수 있었던 길이었다. 러시아 대륙에서 살다 보니, 1,000km는 그냥 가자 하면서 출발한다.
이것이 나그네 인생길이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 생각하는 선교 철학 때문이다. 한곳에 머무는 것은 매우 안정적이고 편해서 좋고,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지지 않는가?
그런데 선교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것이 곧 ‘바벨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낯선 환경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낯선 사람들, 위험, 20시간씩 자동차 운행, 불안, 기차로 갈 때는 3등칸 24-30시간, 모든 것이 부담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생, 역사의 방향성, 그리고 소망의 본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에 매우 소중한 시간들이다.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잘 살펴보면, 성경은 온통 떠남의 역사이다. 그 이유는 모든 민족이 “주의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방의 빛”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단순한 떠남이 아니다.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 ‘떠남의 개념’이 없으면 바벨을 형성하게 된다.
바벨에 갇힌 사람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 성과 대를 쌓고 모이기를 힘쓴다. 그리하여 바벨탑을 쌓게 된다. 그 이유를 몇가지 생각해 보면…,
첫째, 하나로 뭉침이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흩어져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모이기를 힘쓰고 흩어짐을 면하여 자신들의 삶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편안함을 지키는 것이 바벨의 목적이다. 번영을 갈구하고 이름을 높이는 것은 정착된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한 언어를 구사하며 동질성을 가지고 살면서 자신의 이익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바벨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주의는 또 무엇인가? 자신들만 모여서 자기 민족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민족주의, 집단이기주의가 발생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많은 민족들이 바벨을 형성하면서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셋째, 안정되고 편안한 행복한 삶의 추구이다. 우리는 일하고 사는 목적이 좋은 직장으로 많은 돈을 벌어 좋은 집을 사고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모든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세상에서 얻지 못한 부와 평안함과 만족감과 위로를 얻으려는 행복을 추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벨의 한 모습이다.
바벨에 갇힌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민족적이고 안정적이고 전통적이고 율법적인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이기를 힘쓰고,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를 싫어하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예배에 생명을 건다”고 하면서 전통을 고수하는 모습이랄까!
반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핍박과 고난을 통해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 세워진 교회 아닌가? 그래서 매우 역동적이고, 진취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을 불편 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역동적인 선교활동과 바벨 콤플렉스를 벗어 던진 결과로 오늘날 복음을 믿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떨까? 여기가 좋아오니, 하면서 안정과 편리함과 은총을 구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
불편함을 조금도 참지 못하고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어떤가? 바벨에 갇힌 것은 아닐까?
자신의 희생과 섬김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떠드는 것으로 대체하는 모습은 어떤가?
봉사와 섬김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펼쳐져야 함에도, 교회 내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으로 섬김과 희생을 말하고 있는 것이 바벨의 한 모습은 아닌가?
신앙생활이란, 바벨을 포기하는 행위인 것을 생각한다. ‘안정을 포기하는 선언’인 것이다. 불편함을 통해 타인의 구원을 추구하고 세상의 변화를 희망하며, 모든 백성, 모든 민족, 열방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임을 고백하고, 나그네 됨의 불편과 어려움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선교 현장도 자주 방문해야 한다. 어떤 이는 현장방문 왕복 비행대금을 선교비로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주장하기도 하지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현장에서 경험하고 안락함을 포기하고 나그네 인생의 불편함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학습하는 것이기에, 돈으로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더욱 능력 있는 일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불편함을 아주 싫어한다.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도망쳐 버린다. 조금 잘 살게 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보는데, 안락함과 편리함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문화에 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민족, 한 울타리 속에 갇혀 살았던 바벨 문화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교 현장을 방문하면서, 여행 기간 한국에서 햇반과 김치를 수십 개씩 먹을 분량을 다 사온다. 된장과 김치에 젖어 있는 문화를 이해는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쳐다보고 있을 때는 좀 민망하고 불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의 것을 내어주는 것을 싫어한다. 움켜쥐고 소유하고 만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과 소유를 묻어놓는 것이다. 이것 역시 바벨 문화의 한 요소이다.
세계화를 이야기하는 한국교회, 이제는 바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선교적 삶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