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고난의 복음(37) 고난의 의미
오늘은 키에르케고어의 <고난의 복음> 소개의 마지막 시간이다. 그 동안 소개한 글은 1847년에 출판된 <다양한 정신에서의 건덕적 강화(Upbuilding Discourses in Various Spirits)>에 실린 글 중에서 제3부에 해당되는 내용을 편집하여 제공했다.
<고난의 복음>은 총 7편의 강화가 실려 있고, 이 강화들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고난’이다.
키에르케고어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한 고난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 고난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사람들의 고난의 의미와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고난 혹은 고통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했던 사람 중에 하나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포이어바흐이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은 고난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인간 수난의 역사다”라고 말한다. 키에르케고어도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난당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키에르케고어와 포이어바흐는 일맥상통한다. 기독교는 고난당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신적 고난으로부터 인간의 고난을 추론했다. 곧 “신이 고난당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난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신의 고난이란 신학적으로 이해할 때, 인간의 고난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주장인 셈이다.
아마도 이런 ‘신적 나약함’에 대한 주장은 멀리 계신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저항하며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사람이 알베르 카뮈다. 그는 이런 저항을 전형적으로 나타낸 인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이 신을 도덕적 판단에 굴복시킬 때,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신을 죽인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 역시 ‘고난’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로잡힌 대표적인 신학자다. 그는 “무신론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가 고난당할 때, 고난당하고 있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탄식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냐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 역시 고난당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보자. 시몬 웨일은 인간의 고난과 신적 고난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뒤집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인간이 고난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고난을 당해야 하지만 누가 먼저 고난당하는지에 대한 차이일 뿐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런 점에서 인간의 고난과 신적 고난과의 관계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인간과 신 사이에는 일종의 인간과 신과의 상호 호혜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인간이 신으로 인해 고난당하듯, 신 역시 인간으로 인해 고난당해야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키에르케고어는 이런 주장에 반대한다. 키에르케고어의 생각 속에는 이런 상호 호혜성이 없다.
<고난의 복음>을 통해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의 고난과 인간의 고난은 질적인 절대적 차이가 있다는 데 있다. 이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상호성을 부정하는 존재론적 차이다. 그는 고난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간적이다. 하지만 초인간적이다. 그분의 고난과 인간의 고난은 영원한 차이의 심연이 존재한다.”
<고난의 복음>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고난당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죄 없이 고난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주님의 탄식은 시편 22편 1절과 연관돼 있지만, 그리스도는 이 시편 기자의 탄식을 신적 고난으로 바꾼다. 다시 말해, 이 탄식은 인간적인 탄식일 수 없다.
키에르케고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두려움과 떨림 없이는 말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은 이 공포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서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당했는지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마치 육체적 고통으로 바꾸려 하는 자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흉내내는 자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순교자들 중에서 아무리 심한 극형에 처한 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더 고통스럽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인가?
그리스도의 고난은 육체적 고통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는 시험을 당한 유일한 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십자가에서 죽는 그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다.
인간은 죽는 그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를 버려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스데반 집사가 돌로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담대히 그 길을 갈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죽는 그 순간 그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어떠한가? 그는 정말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유일한 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이다.
그가 저술한 <고난의 복음>의 중요성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동안 논의에서 밝혔다시피 인간적 고난과 신적 고난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고, 고난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디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지 그 샘솟는 기쁨의 길을 밝힌 점이다.
그동안 총 37회로 <고난의 복음>을 소개하였다. 이 내용들은 조만간 책으로 출간되어 나올 예정이다. 관심을 갖고 읽어준 독자들과 또한 기회를 준 이대웅 기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키에르케고어의 <고난의 복음> 소개는 끝났지만, 앞으로 다른 주제로 찾아뵐 예정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