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
본지는 [박진호 목사의 신앙문답]을 매주 1회 연재합니다. 미국 남침례교단 목사인 그는 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의 글은 박 목사가 운영하는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그가 직접 쓴 것으로, 본지는 박 목사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합니다. 아울러 필자의 요청에 따라, 글이 그의 웹페이지에 게시된 날짜를 맨 아래 밝혀둡니다.
평생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누차 강조하지만 욥기의 주제는 인생에는 평생을 두고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으며 그 안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그런 고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끌거나 명하신 일이라면 목숨 바쳐서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불시에 그것도 자연 재앙으로 데려갔지만 아브라함더러는 직접 외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세 때에, 욥이 아들들을 잃었을 때보다 훨씬 더 늙은 후에 기적적으로 주신 약속의 아들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것도 직접 죽여서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합니다. 물론 이삭도 욥의 아들들처럼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시험에 아무 연관도 없고 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무 의심과 불평 없이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러 하더니"(창22:10) 아브라함이 종교적 의무감으로 짐짓 순종하는 흉내를 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이려 칼을 완전히 치켜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순전한 믿음을 보신 후에야 미리 예비해 놓은 어린 양을 고개를 돌려 발견토록 해주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이와 같은 종류의 시험을 의심과 불만 없이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더러 제일 먼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가르친(마6:10)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을 욥의 경우에 대입시켜 봅시다. 욥의 아들들을 다 죽이기로 하늘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욥더러 자기 아들이 다 죽도록 기도하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욥은 그런 엄청난 계획을 전혀 몰랐고 하나님이 그렇게 시킬 리도 없지만 엄밀히 적용하면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믿음에 대해 절대로 피상적으로 이해하여서 적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무소불능한 능력만 붙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그 이유를 아예 알지도 못하는 엄청난 고난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 고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순교를 당할 여건으로 이끌면, 그런 자야말로 아무 잘못과 죄가 없고 그 반대인데도, 당연히 순종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끝까지 억울한(?) 욥
욥기의 결론도 자세히 보면 욥 본인은 왜 자기 아들들이 죽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끝까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했던 것이 자기 잘못이자 신자가 행할 바를 넘어선 것이라는 진리만 단순히 깨달았을 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도 심각한 결론입니다. 그럼 신자의 평생 동안의 영적인 여정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신자만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천국에서 주님을 다시 만날 때에나,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완성 시킬 때는 이 땅에서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것들을 온전히 다 알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5-18)
이 땅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의 원인과 과정과 배후에 작용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천국에서 주님과 얼굴을 맞대면 하면 수건이 벗기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명확히 알 수 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특별히 주께서 우리를 아는 것 같이 나도 그분과 그분의 사역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의 모든 일들을 당신의 전지성에 의거하여 주관하십니다. 인류의 역사를 태초의 창조에서 종말의 완성까지 당신만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신자 각 개인의 존재와 삶과 일생은 그분의 그런 완벽한 주권 안에서 아주 짧은 특정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 찰나 밖에 안 되는 신자의 일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신자 본인은 물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영광을 이뤄나가는 과정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찰나를 사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정한 일은 하늘에 올라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선 자기와 자기 주변의 가시적 현상만 알뿐 태초부터 영원까지 완벽한 계획으로 자기를 주관하신 내용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분의 전지성으로 세워진 바로 그 계획과 그 실현과정과 그로 인한 영광스런 결실까지 다 알고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욥의 자녀들이 일시에 죽은 것도 하나님의 그런 영광스런 인도하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욥은 이 땅에선 감히 알려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고백하며 말문을 닫았습니다. 이만해도 상당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그분의 놀라운 계획과 영광 앞에 진짜로 유구무언이 되어서 오직 그분께 세세토록 영광과 찬양과 경배만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신자에게 이유도 모르는 환난 재앙 사고 등이 빈발합니다. 그 모든 불행마저도 하늘에서 정해져 땅에서 이뤄진 결과인데 그 의미는 하늘에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더욱 천국에 대한 소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곳에는 단순히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역사하는 곳으로 어떤 모순 불의 거짓 왜곡 모략 미혹 의심 등이라곤 없습니다. 신자가 그야말로 진리 안에서 넘치는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리는 곳입니다. 신자가 가진 믿음의 특권이며 궁극적으로 욥이 이 땅에서 완성치 못한 믿음이 정금 같이 나오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땅에선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한 믿음이 부재 내지 결핍하고 대신에 전능성만 붙드는 바람에 고난을 견디기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고난과 죄악이 아예 존재도 않는 천국에선 하나님의 전능성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반면에 천국 신자에겐 전지성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생성되고 그분의 완벽한 진리 안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담대히 원한다"(고후5:8)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자의 특권입니다. 이 땅에서 고난의 이유를 미처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알 수 없기에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마저 하나님의 배려인 셈입니다. 나아가 천국에선 어차피 그 모든 것을 알고 오히려 더 감사하게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아버지 때문에 희생한(?) 아들들
질문자께서 "아버지의 연단 때문에 자녀들은 희생양이 되어도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의문도 정답 중의 하나입니다. 욥의 연단을 위해 아들들이 희생을 당한 것도 일부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꿰뚫어서 아시는 분의 뜻과 계획에 따라 죽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우상 신들처럼 자기감정대로 행하는 분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결코 불완전 부족 잘못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일시에 잘못 없이 죽었으니까 욥기를 읽는 신자로선 자연히 감정적으로 아주 힘들어지고 그분에 대해 완전히 이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적 관점을 좀 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과정을 잘 반추해보십시오. 처음부터 믿음의 가정에 태어난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설령 믿음의 가정이라고 해도 반드시 최초로 믿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많은 불신자 선조들은 물론 바로 자기 부모가 지옥 심판을 받은 희생의 결과입니다. 이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실제로도 한 명의 죄인이 구원을 받음에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알게 모르게 기도하고 섬긴 결실입니다. 또 하나님 그분이 신자의 문 밖에서 계속 두드리고 또 두드린 결과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독생자 구세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한 생명과 맞바꾸어준 도무지 감당은 물론 형용할 수도 없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욥의 자녀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한다면 바로 우리 부모나 선조의 희생에도 동일한 아니 더 큰 아픔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 평생을 눈물 흘리며 애통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판국에 과연 욥의 자녀들만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물론 그 심정과 생각은 이해가 되지만, 따지는 것이 신자로써 올바른 자세일지 자기 자신의 믿음부터 욥, 아브라함, 바울 등과 비교해서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자 뿌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절대로 놓치거나 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맞대면 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어떤 것을 동원해도, 아무리 경건하고 심오하고 의로운 도덕 철학 종교 선행이라도 그분의 의에 결코 도달시키지 못합니다. 예수 십자가 이전의 모든 이들은 오직 절망과 죽음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를 아무 때나 그분의 (영원하고 완벽한) 뜻에 따라 죽여도 인간은 그분 앞에 단 한마디 항변은커녕 불만과 의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믿음의 핵심입니다. 신자는 그 반대되는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또 "왜 내 같은 자에게 구원을 베풀었는지"(Why me?)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에선 욥의 아들이 죽은 이유를 모르듯이 신자가 구원 받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천국에 가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런 교리를 알고 동의한다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절대적 택하심에는 신자와의 일대일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성령의 거듭남이 반드시 따릅니다. 정말로 예수를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일생일대의 뒤집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 그분과 신자 자신은 압니다. 그래서 왜 나를 구원해주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이전과 같이 살지 않을 것이며 그분을 따르겠다는 결단 헌신 순종이 이어집니다. 비록 때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그것도 그분의 도우심에 따라 계속 한 걸음 한 걸음 외롭고 지치며 세상의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며 천국으로 향하며 걸어갑니다.
물론 참 신자라면 이 땅에서도 언젠가는 아브라함이 도달한 모리아산의 정상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고난을 많이 겪어서 인생의 헛됨을 절감하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나님 하시는 일은 다 옳습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오직 음란 궤휼 살인 도둑 간음 거짓뿐임을 날이 갈수록 절감하였고 주님의 긍휼 없이는 도무지 한 시도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시작과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라는 고백이 저절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자신이 왜 구원 받았는지, 왜 지금도 주님이 나를 붙들고 은혜를 계속 베푸는 지도 모르기에 다른 사람의 일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진토 같은 인간인지라 가까운 사람들, 특별히 자식의 희생에는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불의함이 한 치도 없으시며 이 땅에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원하신 은혜를 하늘에 가면 알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희생당한 자들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임을"(사57:1) 깨닫고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앙생활이란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자신을 깨트려 나가며 오직 주님과 그분과 함께 거할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에 제대로 반응하며 살아가기에도 너무나 부족하고 많은 잘못을 범하는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신자의 인생에도 평생 이유를 알지 못하는 큰 고난이 수시로 닥칩니다. 따라서 신자로서 아니 신자이니까 행할 수 있는 바는 주님이 나에게 현재 베풀어주는 은혜와 긍휼을, 이마저도 그 이유를 평생 알 수 없지만, 감사히 여기며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분의 자녀답게 마땅히 살아가야 할 모습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끝)
20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