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4) 후회의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인생에서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가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혹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한다(고후 7:8)”고 말한다. 사람은 인생을 살다 보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
후회는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전도서는 ‘허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어쩌면 우리는 더욱 후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가끔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후회해 봐야 과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후회는 우리가 영원의 때를 갖기 위한 첫 번째 정신 운동이다.
나는 오히려 후회가 오늘 묵상하고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곧 ‘경건한 슬픔’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 주제인 후회다. 이 주제를 조금 비유적으로 설명해 볼 요량이다.
나그네가 길을 걷는다. 길을 걷는 나그네가 올바른 길을 걷는지, 이 길이 필경 진리의 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때 나그네는 이 길이 올바른 길인지 살피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 길의 뒤를 보기도 하고 길의 앞을 보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다. 곧, 나그네가 길을 걸을 때 앞을 보기도 하고 뒤를 보기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나그네가 되어 길을 걸을 때 뒤를 보는 것이 후회요, 앞을 보는 것이 회개다.
후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고 연결시키는 정신 운동이다. 뒤를 돌아보는 후회가 없는데, 어떻게 회개에 이를 수 있는가? 이 후회가 경건한 슬픔을 낳고 이 경건한 슬픔은 곧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그네인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정신 운동이 있다. 그것이 바로 후회와 회개 운동이다.
우리는 후회와 회개에 대해, 그것이 감히 때를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곧 태평할 때가 있다면, 회개하는 중에 엎드릴 때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회개의 걱정하는 긴급성과 비교할 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오늘 나눈 말씀의 ‘경건한 슬픔’과 비교할 때, 신성모독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위험의 순간에, 이 순간에, 바로 오늘 행해야만 하는 것을 아무 의미 없이 지연시킨다.
나그네가 길을 걸을 때는 어떤 위험이 존재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것이라고 부르는 위험이다. 이 위험은 스스로 멈출 수 없다. 다만 계속 가다 보면, 영원한 파멸이라 불리는 곳으로 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세심한 안내자, 전문가가 있어 방황하는 자를 일깨우고 소리친다.
“안 돼! 그 길로 가지 마. 거기는 위험하다고!”
그리하여 그가 경계심을 갖도록 한다. 이 안내자가 후회다. 그는 언제나 뒤에서 부른다. 그는 소원에 봉사하는 상상의 유연성만큼 민첩하지는 않다. 그는 승리한 목적만큼이나 강하게 세워져 있지 않다.
그는 슬퍼하며 뒤에서 천천히 온다. 그러나 그는 신뢰할 만 하며 신실한 친구다. 이 안내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영원한 파멸의 길을 가고 말 것이다. 폐암 환자가 암 말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건강하다고 느낄 때, 그 병은 최악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후회를 강요하지 마!”
일찍이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래서 그가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면, 필경 파멸에 이를 텐데. 아, 후회가 행해질 수만 있다면, 후회는 확실히 다시 뒤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후회는 이상한 능력이다. 그의 우정은 신실하다. 그리하여 후회에서 완전히 달아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인생의 수많은 일들로부터 몰래 달아나길 바랄 수 있다. 또한 그런 도피에 성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생의 은혜를 입은 자가 마지막 순간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찌들어 있는 모든 고된 일에서 달아났어.”
그러나 누군가 후회에서 달아나기를 바란다면, 후회에 반항하고 몰래 도망치길 바란다면, 슬프다, 어떤 것이 더 악화된 것인가? 그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평생 여정 가운데 지켜보고 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두 명의 안내자를 보내주고 있다. 한 명의 안내자는 앞에서 부르고, 다른 안내자는 뒤에서 부른다.
두 안내자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나그네가 거기에 우유부단하게 서있도록 남겨두지도 않는다. 이중의 부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두 안내자는 서로에게 영원한 이해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한 안내자는 선을 향해 부르고 있고, 다른 안내자는 악으로부터 나오라고 뒤에서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경 안내자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두 명인 이유이다. 왜냐하면 여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앞도 바라보아야 하지만 뒤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슬프다, 좋은 출발을 시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잘못된 길에서 계속 가고 있으니까. 끈질기게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후회는 그를 돌이켜 옛 길로 인도할 수 없다.
긴 행진이 시작될 때, 가끔 번호를 불러 인원 수를 확인할 때가 있다. “앞에서부터 번호”라고 외치면 “일”이라는 부름이 시작되고 모든 사람은 마지막 사람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린다.
마치 이처럼 두 안내자는 사람을 일찍, 그리고 늦게 부른다. 그가 그들의 부름에 집중한다면, 길을 찾는다. 그가 길 위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부름이 장소를 결정하고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 후회의 부름이 더욱 좋다. 왜냐하면 가볍게 길을 따라가고 있는 무심한 나그네는 ‘후회의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가 알고 있는 것만큼 후회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분투하기만 하는 나그네는 후회하는 자가 길을 알고 있는 것만큼 잘 알지 못한다.
열성적인 나그네는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나 또한 경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후회하는 나그네는 뒤에서 따라온다. 열심히 경험을 모으며 온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