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
* 본지는 유영익 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가 과거에 쓴 논문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건국 리더십'을 다시 소개합니다. 최근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관련,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촉발시킨 논란과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그의 기독교 신앙을 다시 돌아보고자 합니다. 유 교수는 미국 휴스턴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부교수(Tenure 취득),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 역사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부설 현대한국학연구소 창립소장,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1. 머리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건국대통령'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이 대통령은 1948년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대한민국을 세운 다음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다스리면서 기독교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결과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이 글에서는 이승만이 기독교에 입교한 경위와 개종 후 그가 펼친 전도활동을 살펴본 다음 대한민국 건국 당시와 그 후에 그가 어떻게 신생공화국을 기독교 국가로 변모시켰는지를 간단히 논해 보겠다.
2. 이승만의 개종과 기독교 교육·전도활동
이승만은 만 20세가 되는 1895년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설립한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아침 학당에서 의무화한 예배에 참석하여 아펜젤러 당장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에게 배재학당에 입학하더라도 '야소교'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기 때문에 재학 중에는 기독교에 개종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배재학당 졸업 후 그는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활동을 펼치던 끝에 고종(高宗)황제를 폐위시키고 그 대신 급진개혁가 박영효(朴泳孝) 중심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그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체포되어 1899년 1월에 경무청 감방에 투옥되었다.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릴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한계상황에서 캐나다 선교사가 차입해 준 성경을 홀로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믿게 되어 목에 드리운 칼에 머리를 얹은 채 "오, 하나님! 저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원해 주옵소서(Oh God, save my soul and save my country)"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를 계기로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였다(이승만은 1905년 4월 23일 부활절에 미국 워싱턴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이승만은 고등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에 처해졌지만 특사(特赦)를 받아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영어(囹圄)생활을 하였다. 일단 하나님을 믿게 된 이승만은 감옥서 안에 옥중도서실을 개설하고 《영한사전》을 편찬하며 《독립정신》을 저술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서 그는 성경반을 조직하여 동료 정치범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옥중의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성감옥서에서 풀려날 때까지 40여 명의 죄수와 옥리(獄吏)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놀라운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요컨대, 이승만은 국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왕족 출신 기독교인으로서 그 당시까지 한국에 와 있던 어느 외국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수의 동포를 기독교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 전도자였다.
이승만은 1904년 여름 한성감옥서 안에서 저술한 그의 명저 《독립정신》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데, 이 교[야소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고 갈파하였다.
즉, 그는 비록 대한제국은 명망지경에 도달하였지만 우리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드려 이를 국기(國基)로 삼는다면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영국 같은 1등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는 동안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과한 사명이 한국 백성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베풀어 장차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자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1904년 8월 한성감옥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동부의 조지 워싱턴대(George Washington University),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및 프린스턴대(Princeton University) 등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주로 국제법, 정치학, 서양사, 철학사 등을 전공하되 기독교 신학을 곁들여 공부하면서 장차 귀국하여 기독교 교육에 투신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일류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였다. 이것은 동·서양의 교육사(敎育史)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였다. 여하튼 그는 1910년에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분야의 박사학위(Ph.D.)를 취득하였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사(특히 미국사) 및 국제법 등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작업을 펼쳤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105인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구금하려 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동아시아 총책 해리스(Merriman C. 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서울을 탈출,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태평양의 고도(孤島) 하와이를 망명지로 택하고 호놀룰루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약 5,000명의 한인 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 및 교육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우선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이를 통해 한인 교포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이라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포들을 교육하고, 또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라는 교회를 창립하여 그 교회의 이사장 내지 선교부장직을 맡아 사실상 목회자 역할을 담당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와이에 칩거하면서 그곳에 이민으로 정착한 한인들을 애국적인 기독교 교인 집단으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19년에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와 서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국무총리 내지 집정관총재-얼마 후에는 '임시 대통령'-라는 임시정부의 최고위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와이에서 펼치고 있던 교육과 전도사업을 접고 미국 동부로 건너가 워싱턴D.C.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시점인 4월 8일경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어느 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의 주의(主意)는 한국에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3·1운동의 주도세력은 기독교 교인이라고 믿고 자기는 새로 태어난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 후 1919년 8월에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Chief Executive)의 직권으로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이 기구를 통하여 외교와 선전 위주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미위원부의 위원장과 위원(Commissioner) 등 핵심 간부들을 모두 독실한 기독교 목사 내지 장로들 가운데서 선임하였다. 동시에 그는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서재필과 협력하여 다수의 미국인 기독교 목회자들을 포섭, 그들로 하여금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토록 하였다.
1941년 말 진주만 사건(Pearl Harbor)을 계기로 미·일 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에도 그는 워싱턴D.C.의 파운드리 감리교회(The Foundry Methodist Church)의 목사이며 미 연방상원의 원목(chaplain)인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사를 이사장으로 받들고 '한미협의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고 또 일제시대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애비슨(O. R. Avison) 박사를 주축으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이들 두 단체의 적극적 지원을 얻어 미국 정부에 승인 획득에 필요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3. 대한민국 건국기의 언행
해방 후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1945년 11월 28일 정동예배당에서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예배를 드린 다음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40년 동안 사람이 당하지 못할 갖은 고난을 받으며 감옥의 불같은 악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데 있어서 아까 김구 주석의 말씀대로 튼튼한 반석 위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 후 이승만은 1946년 2월에 반탁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대중조직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1946년 6월에는 남한에 자율정부-이른바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추진기구로서 '민족통일총본부'(민통)를 발족시켰다. 이어서 1947년 7~8월에는 남한단정 수립과 총선거를 관철하는 기구로서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총선대책위원회'를 조직·발족시켰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들 여러 단체의 지도부에 기독교 목사와 장로 그리고 권사들(예컨대, 이윤영, 배은희 등 목사와 김활란 등 여성 지도자)을 발탁·기용하였다. 말하자면, 이승만은 해방 후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국가 건설 작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동대문 갑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제헌국회 임시의장 이승만은 이 역사적 회의를 개시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윤영(李允榮) 목사(의원)에게 식순에 없는 기도를 부탁하였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 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탁에 응하여 단상에 오른 이윤영 목사는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 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야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야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 기도 후 계속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재석 의원 198명 중 188표로 의장에 당선되었는데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이승만 의장은 다시 한 번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된다고 발언하였다.
"우리가[는]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련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약 두 달이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7월 24일에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했다.
4.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5월에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와 함께 조석(朝夕)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하였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형해화(形骸化)시키면서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교세신장을 위해 일련의 특혜조치를 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실시한 주요 조치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였다.
(2)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꾸었다.
(3) 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도입함으로써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기독교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刑牧 制度)를 도입하여 옥중의 죄수들에게 기독교 전도의 문을 열었다.
(4) 정부 요직에 기독교 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권장하였다.
(5) 기독교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W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했다.
(6) 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기간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개별 교회와 교역자들 그리고 신학교 등에 배분토록 하였다.
해방 전 (현재의 남북한을 합친)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38선 이남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는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1950년에 이르러 그 수가 60만 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무려 16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는-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에 다져진 기초를 바탕으로-날로 팽창하여 2005년 말 현재 기독교인 총수가 1,376만 명(개신교 861만 명; 가톨릭교 514만 명)에 도달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정권의 탄생을 경험하였고 나아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5. 맺음말
이승만은 조선 왕조의 왕족 가운데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지식인 개혁가였다. 한성감옥서에서 성경을 연구하며 옥중 전도에 열을 올린 결과 40여 명을 기독교로 인도하는 놀라운 전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한국 백성을 기독교로써 거듭 나게 만들 목적으로 미국 유학 기간에 기독교 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서울과 호놀룰루에서 다년간 기독교 교육 내지 전도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후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그는 새로 태어날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해방 후 33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귀국 직후 정동교회 예배당에서 '성경말씀을 토대로'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는 제1차 제헌국회의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맨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써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고 서약했다.
그 후 12년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남한을 통치하면서 그는 음·양으로 기독교 보급에 힘을 기울인 결과-원래 '모범적인' 유교 및 불교 국가였던-우리나라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다져진 기독교 교회의 기반은 1960년대 이후 '폭발적인' 교세 신장의 도약대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공(功)은 서기 313년에 '종교 자유의 칙령'을 발포함으로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r. 306-337)의 공적에 비견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