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검은 사제들> 감독의 <사바하>
기독교에 연기설(緣起說)을 장착시킨 영화 <사바하>.
‘그것’과 활불.
1899년에 출생한 남자가 활불(살아있는 부처)의 경지에 오른다. 그러나 그가 ‘진짜’ 활불임을 인준해 주는 한 고승의 예언을 통해, 그만 ‘가짜’로 전락한다. 정작 그 예언이 연쇄 살인 또는 집단 살인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는 마치 헤롯 왕이 자신의 천적으로 여긴 메시아의 임재를 막기 위해 저지른 유아 집단살해를 연상시킨다.
쌍둥이 자매.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은 쌍둥이 언니는 온몸에 털이 나 있다. 태에서부터 영양공급이 되지 않던 이 아이는 태중에서 형제의 다리를 섭취하여 생존한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태중에 형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것을 연상시킨다. 그런 언니를 독살하려다 돌이킨 동생의 스웨터를 입은 순간 ‘그것’의 털이 벗겨짐은, 마치 야곱이 형 에서의 외관처럼 털을 착용하고서 복을 받는 이야기 ‘패러독스’를 연상시킨다.
이리하여 태생이 저주 받았던 ‘그것’의 운명은 앞서 활불의 경지에 올랐던 ‘진짜’에게 옮겨가고, ‘진짜’의 운수는 ‘그것’에게로 넘어가 진짜 ‘미륵’이 되었다ㅡ는 이런 세계관, 이것을 바로 연기설(緣起說)이라 부른다.
이 같은 혼합 세계관을 접했을 때 기독교인은, 기독교에도 ‘연기’가 있구나 하고 착시를 일으키기 마련인데, 다음 몇 가지를 유념하고 있으면 좋다.
1. 이처럼 영화 <사바하>는 기독교 테마에 연기설을 장착시켜 세계관을 구현하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다(중요).
야곱과 에서가 마치 순환 구조 속에서 뒤바뀐 운명처럼 착시를 일으키지만,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고 한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영화에서처럼 인(因, 원인)과 연(緣, 조건)의 힘을 얻어 악(惡)으로부터 뒤바뀌는 어떤 것이 선(善)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의 뜻에 따라 택함을 받은 것이(롬 9:11) 바로 선이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리켜 칭의(δικαιοσύνη)라 부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르시는 분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전적인 결과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세계관을 제외한 모든 구원관은 자력구원(自力救援)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Predestination)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2. 영화 <사바하>는 종교의 3요소를 교주·신도·경전이라고 규정하지만, 기독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사교(邪敎)의 흔한 교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를 ‘교주’라 칭하지만, 예수는 교리나 경전을 남긴 교주가 아니라, 자신이 곧 ‘계시’이기 때문이다.
3. 영화 <사바하>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것이 연기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 모호한 선과 악의 경계 자체가 통째로 궁극적 악이다. 악이 영원 회귀의 반복을 통하여 선에 도달한다는(인도철학 또는 불교의) 가르침과 달리, 그 반복된 회귀에서 산출된 지식을 궁극적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선악과’가 아닌,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עֵץ הַדַּעַת טֹוב וָרָע)가 악의 본진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뱀의 기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감독 장재현은 <검은 사제들> 때보다 기호를 구사하는 기술은 늘었지만 해석학적 역류는 현저히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특히 뱀에 관한 이해와 표현은 전작에 비해 별로…).
이는 지나치게 뭔가 기호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이 한 원인일 것이다. 기호와 상징은 그런 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