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루벤스, ‘바리새인 시몬의 집 잔치’
이 그림을 소개할까 말까 망설였다.
보다시피 성화로서는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노출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굳이 여성의 어깨를 저렇게까지 노출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도상일 것이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도유’에 관한 4개 복음서 동일 단화 중 누가복음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왜 그런지 하나씩 살펴보겠다.
첫 번째, 향유 & 옥합.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옥합(ἀλάβαστρον)’이란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엔 옥합이란 말이 없다. 대신 ‘한 근’이란 말을 썼다.
한근(리트라, λίτραν)는 약 327그램 정도이다. 실로 엄청난 양을 머리 또는 발에 부은 셈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요한복음의 도유 장면은 아니다. 옥합이 있기 때문.
두 번째, 도유 부위.
마태는 마가복음에서 향유를 부은 부위가 머리인 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복음은 머리가 아닌 발에 붓는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무난한 도유를 그린 반면, 누가와 요한은 발에 도유함으로써 역설의 도유를 강조하였다.
특히 누가복음은 도유하는 여인이 명백한 ‘죄인’임을 밝힘으로써, 그리스도는 위대한 사제나 예언자가 아닌 ‘죄인’에게 도유를 받았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도상의 여성이 죄 많은 여성인지, 아니면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인지는 알 수 없다.
세 번째, 장소.
이제 이곳이 어디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어디일까. 마태는 마가가 기록한 대로 ‘기름부음’의 장소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었다고 기록한다. 그럼 이 도상이 나병환자 집 같은가?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한편 누가복음은 바리새인 집이라 기록하고는 그 집주인을 ‘시몬’이라 부른다. 이미 이 작품은 제목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 잔치’이다. 그런데 어디를 봐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인 줄을 알까?
네 번째, 비난하는 자.
마가복음에서 이 여성을 비난한 자는 ‘어떤 사람’이다. 마태에서는 ‘제자들’이 비난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그 제자가 ‘가룟 유다’임을 명시한다. 특히 가룟 유다가 이렇게 외친다. “어찌하여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비난하는 자가 없다. 이 점이 특이하다.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마음 속으로 이 광경을 요상하게 여기는데, 특이하다고 한 것은 이런 점이다.
바로 이 바리새인은 향유의 값어치/ 가격을 가지고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옥합을 깨뜨린 그 여성이 예수의 발을 ‘만지는 것’에 관심하는 점이다. 특이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루벤스가 그린 이 도유의 도상을 누가복음의 장면이라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집주인은 “예수의 발을 만지는 것”, 즉 여성의 신분…, 그런 신분의 여성과의 접촉을 암시한다. 이것이 루벤스가 과도하게 여성의 어깨를 드러낸 이유이다.
다섯 번째, 왼쪽 & 오른쪽.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히 천한 여인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 이상의 구도에서, 무엇보다 루벤스는 지금까지 4개 복음서의 상이한 증언을 잘 종합해내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그림은 중세 회화 구도의 전형 그대로 좌와 우의 구도를 갖는데,
왼편에 앉은 사람들 위로는 하늘이 있고, (예수께서 앉으신) 오른편에는 하늘이 없다. 창문이 왼쪽에만 나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리스도를 몰아 넣은 것일까?
그렇지만 왼편의 하늘은 어지럽기 짝이 없다. 공중으로 뭔가를 들고 실어 나르고, 분주하기만 하다.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다.
게다가 왼편으로 갈수록 남성들의 표정은 표독스럽고 적의에 차 있다. 예수의 오른쪽 남성을 제외하고는, 왼쪽으로 갈수록 공감 대신 적의를 더해가는 구도인 것이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역사적 유대인들이라기보다, 당대의 가톨릭을 표지하는 것 같다. 가장 좌측의 안경 쓴 인물은 당대 최신의 ‘이론의 종교’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루벤스는 종교개혁 화가인가… 싶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정중앙에 있는 남성의 경우, 바로 개혁주의자들의 복장과 근사하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은 좌측의 바리새인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이지도 않다. 거만함 또는 반신반의에 찬 표정이다.
게다가 그는 우측 예수님과 좌측 바리새인(가톨릭)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이 구도는 누구의 시각이란 말인가?
이는 다름 아닌 반(反)종교개혁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즉 종교개혁(1517) 이후에 개혁자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가톨릭교회 나름대로 극복하고서, 참된 개혁을 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나온 운동을 말한다(반종교개혁은 안티(anti) 리포메이션이 아니라 카운터(counter) 리포메이션).
한 마디로 지난 그림의 렘브란트가 ‘개신교 개혁주의적 바로크’였다면, 루벤스는 ‘가톨릭 반종교개혁적 바로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루벤스의 아버지는 칼빈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왜 루벤스는 개신교/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을까.
칼빈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클라이언트의 후처와 바람이 나서 감옥을 가게 되었고 감옥에 갔을 때, 루벤스가 태어난다. 이 환경은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어쨌든 루벤스는 칼빈주의자에서, 가톨릭 스타일의 개혁주의자로 개종을 하고 만다.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이 도상이 시사하는 바는 ‘개혁주의냐, 가톨릭이냐’ 이런 문제가 아니다.
왼쪽과 오른쪽, 심지어 중간을 포함한 횡단이 아니라, 어깨 벗겨진 여성의 눈높이 하단에서의 시각이 바로 이 도상의 정위점라는 사실이다.
극단적인 좌파 사회주의자는 가룟 유다처럼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았느냐!”
반면 부패한 보수는 그리스도의 장례식 향유엔 1도 관심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여자가 그리스도의 발을 만지고 있지 않느냐!”
이런 극대 극 구도 속에서, 사실은 부패한 보수뿐 아니라 어느새 프로테스탄트까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적시가, 바로 이 도상이 이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인 것이다.
끝으로 마지막 기호가 하나 있다.
루벤스는 이 여성의 눈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기호를 하나 남기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발 옆의 책상 다리가 짐승 또는 사자의 발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 반대편의 뼈다귀를 물고 짖는 개와 대응된 위용으로서, 이는 창세기에서 유다가 야곱에게서 받은 기호라 하겠다.
https://youtu.be/aeUKd5Q28L8
사순절 제5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