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샤갈의 ‘불타는 가시나무’
마지막 도상.
부활절은 예수께서 부활한 날이 아니다. 부활절은 예수께서 부활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한 날이 어느 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날짜는 몰라도,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몰라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는 ‘내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성황당에서 비는 사람은 빌고 있는 자기 정성을 믿고, 석가모니에게 비는 사람은 석가의 모범을 믿지만,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 2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부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부활’을 어떻게 믿는 것이냐. 부활 후 ‘몸을 나타내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이를 ‘현현’이라 부른다.
썩은 시체에 새 살이 돋아나는 매직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그가 ‘몸을 나타내신’ 것이다. 신은 그런 방식으로만 ‘현현’하기 때문이다.
그 부활한 몸을 본 자를 ‘목격자’라 부른다. 그렇다면 부활을 보지 못한 우리가 2019년을 살면서 믿는다고 하는 그 부활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목격자’의 증언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다.
우리는 ‘목격자의 증언을 믿는 것’이지, 썩은 시체에 새 살이 돋아나는 ‘매직’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정체성에서 위배될 때, 절도요 이단이다.
그래서 기독교 발원 첫 세기가 중요했던 것인데, 100년 정도 되는 이 1세기 구간을, 처음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선방을 해주었다. 순교들을 한 것이다.
이 순교의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도둑질 한 것도 아니요, 살인을 한 것도 아니요, 자신들이 믿는 그 신념(신앙)을 위해 죽는 광경은, 광기에 빠진 자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충격파가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던지, 그 감동을 막기 위하여 3세기 중반부터는 박해의 양상이 바뀔 정도였다. 처형이 아닌 극한(배도를 유도한) 고문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교회의 설립자나 감독들은 거의 다 죽어나갔다. 감독이 죽으면 장로가 그 죽은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된 다음 그도 역시 죽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그 뒤를 이었다. (오리겐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순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 시대에는 ‘자살’을 해야 최고로 쳐주는데, 순교와 자살에는 지대한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그 자체가 순교이다. 이것은 ‘부활’의 알파와 오메가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어떠한 불리한 처지에 있든지, 어떠한 보잘 것 없는 처지에 있든지, 네가 믿는 신이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순교로 그 답을 대신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었다.
오늘 소개하는 이 마지막 (사순절과 부활절) 도상, 초현실주의의 거장 마르크 샤갈의 작품에 그것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마을에 내리는 눈’, ‘도시 위에서’, ‘에펠탑의 신랑신부’ 등 몽환적 표현주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인데, 말년에 ‘출애굽 이야기’라는 일러스트레이션집을 남겼다. 판화집이다.
그 중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하나님 만나는 장면이 오늘의 주된 작품이다(1번 그림).
이 그림에는 야웨 하나님의 이름 ‘יהוה(YHWH)‘가 보인다. 그 외에는 도무지, 초등생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초등생은 표현 못 하는 색채의 기호가 들어 있다.
24색의 Lithography(석판화)인 이 작품에서 우선 핵심 컬러는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이다. 3원색인 셈이다.
빨간 색은 가시나무를 휩싸고 돌고, 노란 색은 빛이 내리는 온 사방에, 그리고 파란 색은 모세 자신의 의복을 매우고 있다.
그리고 간간히 초록색이 보인다. 모세 자신의 얼굴에 약간, 의복에도 조금, 그리고 하늘의 천사에게 칠해져 있다.
1. 빨간 색: 빨강은 하나님의 신성함 같지만, 사실 그것은 가시 덤불 자체요 고생을 표지한다. 이 빨간 색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노역과 피라미드를 휩싸고 있다(2번 그림). 피라미드를 세우는 노역이나 이 간조한 산 위의 가시 덤불에 오르기까지 어느 정도는 같은 것이다.
2. 파란 색: 파랑은 물과 하늘을 표지하면서도 자기 신분을 반영한다. 홍해의 색인 동시에 그 물의 재앙을 건너게 하는 중재자 또는 사제의 신분인 까닭이다.
3. 초록 색과 색 분열: 초록은 오묘한 색이다. 불타는 가시 덤불 앞에서의 자기 얼굴에 묻어 있고 의복에도 섞여 있다[1번 그림]. 특히 이집트 파라오가 이 색채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초록 색 옷을 입고 있는 파라오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모세 자신의 한쪽 손이 초록 색이기도 하다(5번 그림).
4. 노란 색과 색 분열: 노랑은 대부분의 도상에서 빠지지 않는 색이다. 빨간 색과 파란 색도 빠지지 않는 원색이지만, 노란 색이 홀로일 땐 언제나 하이라이트로 임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율법이 온통 노란 색이었으며(4번 그림),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 숭배를 할 때에 모세 자신의 진노가 온통 노란 색으로 타올랐다(3번 그림). 이스라엘 백성이 중노동에 시달릴 때, 그리고 지금 이 불타는 가시덤불을 둘러싼 빛이 또한 노란 색이다.
이들 색채의 혼합과 분열은 자아를 드러낸다. 빨간 색으로 뒤범벅이 된 피라미드와 그 노역에 동원된 동족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 짓는 모세는 이들 전 출애굽의 도상에서의 자아를 주도한다.
한 손은 노란 색, 다른 한 손은 초록 색. 노란 색 손은 노역에 종사하는 동족과 같은 신분을 표지하며, 초록 색 손은 동족에게 노역을 시키는 자신의 신분을 표지한다(2번 그림).
그가 출애굽의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서, 영면에 들 때 그는 초록 색으로 변한다. 그는 반쪽 짜리 초록 색으로서, 가짜 초록 색 옷을 입은 파라오에게서 백성들을 출애굽키고서야 극복한 것일까(6번 그림).
‘색채의 화가’라는 수식이 이름 뒤에 꼭 따라붙는 샤갈의 색채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것이다.
처음 1-2세기를 순교로 선방한 기독교와는 달리, 미국의 절대 보호 아래 성장한 한국 기독교는 두 가지 색채의 기독교를 낳았다.
‘순교’를 세습하고 승계하기보다는 풍요의 송아지를 상속하는 황금색 기독교.
그리고 그 황금색 컴플렉스에 빠진 나머지 황금색을 대신해 건져 올린 자살한 자아의 색, 노란색을 탐닉하는 기독교.
이들 두 한국 기독교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평생을 불행과 위험에 시달리면서도 이 유쾌한 상상력과 표현력, 특히 그 모든 색상을 잃지 않았던 화가 마르크 샤갈의 색채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 ‘יהוה(YHWH)’을 수록했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잘 표현한 게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삼원색, 특히 노란색의 변화무쌍함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그 분을 잘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