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 (8) 마음의 청결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야고보 사도는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충고한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것은 곧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점검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짓고 출발한다면, 마음의 청결이란 한 가지만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음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청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만 마음에 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음이 청결해야 하는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마 5:8). 결과적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야만 그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은 것인가? 우리는 가끔 끔찍한 복수에 사로잡혀 인생을 복수하는 데 낭비하는 사람을 본다.
이뿐인가? 권력만을 원하는 사람, 쾌락만을 생각하는 사람, 성공만 꿈꾸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한 지만 마음에 품은 자들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마음 속에 선을 품은 사람만 한 가지만 마음에 품은 사람이다. 마음 속에 선을 품은 자만이 진리 안에서 선을 품는다. 따라서 사람이 한 가지를 마음에 품는다면, 오직 선을 품어야 한다.
선을 제외한 어떤 것을 한 가지만 품는다 해도, 그것은 한 가지를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를 논의하기 위해 한 가지씩 점검해 보려고 한다.
일단 쾌락을 생각해 보자. 쾌락만을 원하는 사람은 얼마나 쾌락을 원하는가! 하지만 쾌락은 일종의 변화의 표어다. 쾌락을 원하는 자는 실제적으로 변화를 원한다.
쾌락을 원하는 자는 쉽게 싫증난다. 그가 싫증나는 지점까지 즐겼을 때, 변화를 원한다. 이것은 그가 잡다한 것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으로 품고 있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를 품고 즉각적으로 정반대를 품는다. 왜냐하면 쾌락과의 하나 됨은 착각이요, 기만이니까. 그가 품고 있는 것은 쾌락의 다양성이니까.
그가 싫증나는 지점까지 즐겼을 때, 그가 과식했고 결국 지쳤을 때, 그가 여전히 한 가지를 품고 있었다면, 무엇을 품었는가? 그는 새로운 즐거움을 원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만큼 그의 독창성이 흡족하지 않다면, 그의 무기력한 영혼은 분노한다. 그래, 새로운 것! 쾌락이 그에게 봉사할 때, 변화는 그가 요구한 것이다.
변화, 변화! 그가 쾌락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그 종들이 지쳤을 때, 그가 비명을 지른 것은 변화다! 변화, 변화를 가져오시오!
자, 그가 한 가지를 품었는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삶에서의 변화다. 호색가들이 작별을 고해야 할 때, 춤과 소용돌이 쳤던 감각의 소동이 끝날 때, 모든 것들이 진지하고 조용해질 때, 거기에는 사멸가능성의 변화(change of perishableness)가 있다. 거기에는 죽음의 변화도 있다.
때로는 사멸가능성이 도래하지 않도록 자신을 잊는다 해도, 호색가가 이 사멸 가능성을 슬쩍 지나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죽음은 자신을 잊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슬쩍 통과하지 못한다. 죽음은 저 호색가가 원했던 하나이면서 유일한 것을 무(nothing)로 바꾸어 버린다.
마침내, 영원의 변화(change of eternity)가 있다. 영원은 모든 것을 바꾼다. 그래서 오직 선만이 한 가지만을 품었던 자의 축복된 소유가 되고 소유로 남는다.
그러나 어떤 비참함도 손댈 수 없었던 저 부자, 저주스럽게도, 계속해서 한 가지만을 품어야 하는 저 부자, 나사로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저 부자(눅 16:19-26 참고),
그는 지금 실제로 한 가지만을 품고 있는 것인지 저 지옥에서 하나님께 묻고 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