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3)
※ 국내 최초로 백범 김구를 전공으로 법학박사 학위(국민대)를 취득한 홍원식 피스코리아 이사장의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기고를 3회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김구 선생의 호)이 남긴 친필 휘호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요 1:1)”인 터, 그 어떤 영화 못지않은 영웅담을 안고 있는 백범의 공적 삶을 견인해 준 성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내포하고 있는 위 성구를 품고, 백범은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롬 4:18) 하나로 바라는 것들을 현실화(히 11:1)시키는’ 공인의 삶을 살아왔다.
그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가히 불가능한 일들이다. 백범의 74년 인생은 이승만 박사와 마찬가지로,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이다.
어린 시절 이름이 창암(昌巖)이었던 백범은 황해도 해주에서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과거시험 준비 과정에서 습득한 ‘유학(儒學)’을 바탕으로 훈장(1893)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동학(東學)’에 가담하여 녹두(전봉준) 장군이 주도한 고부민란이 있던 해, 최시형 교주로부터 ‘팔봉접주(1894)’ 첩지를 받고 해주 지역 동학군 선봉장이 된 바 있다.
해주성 공격 실패로 와신상담(臥薪嘗膽)에 빠진 그를 구한 사람은 놀랍게도 동학군 토벌대장(안태훈 진사, 안중근 의사 부친)이었다. 적장이었던 안 진사가 청년 백범의 기상을 눈여겨보고 토벌 대상이 아니라 인재로 거듭날 기회를 준 것.
안태훈 진사의 집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던 당시(1895), 백범보다 3살 아래인 안중근(1879년 출생) 형제들과 호형호제하며 필생의 인연을 시작한지 1년 만에, 고종 황제까지 관여하게 되는 사건이 주인공이 된다.
그는 치하포(황해남도 은천군)에서 황해도 지역 간첩으로 암약 중이던 일본군 장교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맨손으로 때려죽여 사형선고(1896. 10.)를 받았으나, 고종 황제의 특사로 사형집행은 면한다.
주도면밀한 준비로 탈옥(1898)에 성공한 뒤 은신처를 찾던 중, ‘불교(佛敎)’에 입문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와 평양 인근 영천암(靈泉巖)에서 승려로 있다가 환속(還俗,1899)했다.
그렇게 유교-동학-불교를 두루 섭렵한 뒤인 1903년 2월, 백범은 소천할 때까지 자신의 공적 삶을 견인해 가는 하나님을 영접한다(28세). “교육계몽운동을 안정적으로 하려면 선교사들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라, 부친 소천을 계기로 개종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백범의 삶(1876. 8. 29-1949. 6. 29)에 하나님이 개입(섭리)하기 시작한 시점은 개종한 때부터인가, 태어날 때부터인가?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사 43:21)’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는 것이 ‘성경에 입각한 정답’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백범의 삶’이 아니라, ‘백범의 삶을 주관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바라시는 뜻(행 1:8)’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백범이 ‘믿음의 사람’임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오직 성령만이 확증할 수 있을 것이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라 하신 성구에 입각해 논증(論證)한다면 다음과 같다.
‘겸손하되 담대한 리더십’을 실천하는 삶을 산 백범
'백정범부(白丁凡夫)'를 축약하고 있는 호 ‘백범(白凡)’이 이를 실증한다. 도살장 노무자인 ‘백정’이나 농부 및 어부를 통칭한 ‘범부’들처럼,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호에 담았다.
안중근 의사가 옥사한지 1년 뒤인 1911년, 백범은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수감생활을 하던 중, 이름을 구(九)로 바꾸면서 ‘섬김의 삶’을 서원하는 호를 지었다. 평생 그가 지향해 온 성령의 아홉 열매(갈 5:22)와 직결되는 새 이름 ‘구(九)’도 본질상 ‘겸손’을 전제로 한다.
백범이 기독교인이 된 뒤 장련공립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기점으로 시작한 교육계몽운동(1903-1909), 이동녕, 이승훈 등과 함께 결성한 신민회(1910) 활동도 섬김의 리더십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의 ‘겸손(섬김) 리더십’은 “복역 중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라는 내용의 백범일지에서도 확인된다.
한없이 겸손한 그였지만, 때로는 ‘담대한 리더십’을 발산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해야 할 만큼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봉창 의거(1931. 1. 8)를 기획해 히로히토 일왕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지만, 3개월여 후 윤봉길 의거(4. 29)를 기획해 결국 성공시켰다.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을 전 세계로 알리는 대 전기를 마련하여,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자금이 조성되어 임시정부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윤봉길 의거 성공에 고무된 당시 중국의 실세 장개석(제스)와 백범간의 만남(1933. 5. 10)이 이루어진 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독립군을 조직적으로 육성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통합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한 백범의 삶
백범은 대인관계에서 화합을 지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의 관계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임시의정원에서 탄핵 파면(1925. 3. 23)되어 정치적 어려움에 처한 우남(이승만 대통령의 호)을 국제연맹 파견 전권대사로 임명(1932. 11. 10)해 국내외 정치에서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다.
이후 1941년 6월 4일에도 김구 주석은 우남을 주미 외교위원장(주미대사)으로 임명함으로써, 우남의 해방 전후 정치적 행보에 큰 동력을 부여한바 있다.
물론 우남도 호형호제해 온 백범에게 미국과 관련해 긴밀한 역할로 품앗이를 한다. 임시정부와 미군 OSS부대를 미국통인 이승만 박사가 연계해 준 것이다.
장준하의 <돌베개>나 김준엽의 <장정>에서 명확히 확인되듯, 백범이 미군 OSS부대 최고지휘관인 도노반 소장과 합의하에 한국 광복군 청년들을 OSS 대원으로 훈련시켜 대일공격(1945. 8. 10)을 하려 했으나, 그 직전 일제가 사전에 항복을 선언함으로 말미암아 백지화된 바 있다.
‘한반도 진공작전’을 위한 ‘한·미 합동훈련’상황 최종점검차 현장에 도착한 지청천·이범석 장군을 대동한 백범이 도노반 소장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임시정부와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함축하여 나타내준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백범이 우남에게 보여준 후의에 보답하기 위한 우남의 노력은 해방 직후에도 이뤄진 바 있다.
우남은 ‘맥아더 전용기’로 환국(1945. 10. 16)하기 전, 일본에서 일본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를 통해서 주한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을 미리 소개받은바 있다.
백범 보다 일찍 하지 장군을 알고 지내던 우남은 백범이 환국(1945. 11. 23)하자 다음 날 백범을 안내하여 하지 장군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한다.
하지 장군의 통역이 따로 있었지만, 백범과 하지 장군간이 첫 대면 자리의 통역은 자연스럽게 우남이 맡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를 두고 우남과 백범이 정치적 견해차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돈독한 우의가 확인된 자리였다.
백범은 ‘좌우통합적 리더십’을 실천적으로 발휘하였다
주석으로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백범은 김원봉 김두봉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명실상부한 ‘통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현 경찰청장) 재직 당시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 자세를 취했던 백범은, 사회주의 계열인 이운환의 저격(1938. 5, 당시 63세)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함께 피격된 현익철은 절명하였다.
피격 당시 몸에 박힌 탄환 3개를 빼내지 못하고 여생을 살아야 했던 백범의 입장에서,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을 자신이 주석으로 재직하고 있는 임시정부나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용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좌로도 우로도 치우침이 없는(잠 4:27)’는 리더십으로, 항일 전선에서 민족역량 강화라는 공의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을 내려놓았다.
백범의 이러한 ‘화합적 리더십’은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내전 중이던 양측 지도부 모두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해방 후 귀국을 앞둔 임정 요인들을 위해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환송연이 예정돼 있음을 알았지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수뇌부도 백범과 임정 요인들을 위한 별도의 환송연을 준비해 줄 정도였다.
백범이 지향한 화합적 리더십은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향한 노력으로도 발현됐다. 그 대표적 사례인 1948년 4월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연석회의’다.
남북한 단일 정부수립이 초읽기에 들어가던 시점에서, 조국의 분단을 막아 보겠다며 백범이 김규식 박사와 함께 먼저 북측에 제의해 이뤄진 것이다.
특히 자칫 단순한 군중집회로 끝날 우려가 있었던 ‘남북연석회의’ 말미, 당시 경제적 우위에 있었던 북측이 남측에 물자지원을 하고, 한반도에서의 외국군대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한 ‘공동선언문’을 이끌어 낸 것은 백범의 제안을 받아들인 김일성 위원장과의 ‘양김 회담’ 덕분이었다.
통탄스럽게도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소천한지 1년 뒤, 백범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고자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제의 한반도 양분책략→ 미·소 분점→ 동족상잔→ 일본 전쟁특수 간파
일본 외무성이 감수해 발행(1954)한 ‘일본외교 100년 소사(小史)’에서도 확인되듯, 남북 분단과 남북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한 전후 일본경제 부흥’을 목표로 ‘8.15항복’ 전에 이미 기획해 둔 것이었다.
원폭 투하로 패망의 길에 접어든 일본이 1945년 8월 8일 새벽, 스탈린에게 밀사를 보내 한반도 북반부 점령을 제안한 것이다.
외관상 대일 참전선언 형식으로 당일 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13일 북한 전역을 점령해 버렸다. ‘UN 일반명령 1호’로 맥아더 장군과 UN군이 한반도에 진주(1945. 8. 15)하기 전, 이미 남북은 분단되어 버린 것이다.
백범은 생전 ‘일제의 한반도 양분책략→ 미·소 분점→ 이질적 이념 및 체제 구축→ 동족상잔→ 일본의 전쟁특수→ 분단의 고착화→ 한반도 약소국화’를 꿰뚫어 보았다.
하여 백범은 “이 같은 일제의 책략을 저지하는 길은 ‘민족통일’이며, 민족통일이 되지 않은 한 독립된 나라가 아니기에 ‘통일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독립운동’“이라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역설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민족의 광야에서 ‘썩어진 밀알’이 된 백범
백범은 보기 드문 효자였다. 임종 직전의 아버지를 연명하게 해보겠다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생피를 마시게 해드렸다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엄청난 통증으로 고생을 한 이야기가 백범일지에 있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 했던가. 백범의 선친 또한 소천을 앞둔 노모를 위해 단지(斷指)를 해 생피를 삼키게 하여 삼일을 연명하였는데, 그 삼일 째 되던 날 백범이 태어났다.
백범은 1904년 최준례(崔遵禮) 여사와의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나 막내 신(信: 공군참모총장 역임, 2016, 소천)을 제외하고는 자식들을 모두 가슴에 묻었다.
일제 하 망명정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변변한 치료 한 번 못하고, 안타깝게도 아내마저 막내를 낳은 직후 병을 얻어 1924년 1월 사망했다.
1948년 8월, 백범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모친 곽낙원(郭樂園) 여사와 아내 최준례 여사 및 장남 인(仁)의 유해를 중국에서 봉환해 기독교 연합장으로 천장식을 거행했다. 백범은 가족들에게 못 다한 사랑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쳤다.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중 이운환의 저격을 받아 의식 불명 상태에까지 갔다 깨어났던 백범은, 환국 후에도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백범을 아끼는 지인들이 수집된 정보를 알려주는 중, 당시 공군 조종사였던 차남(김신)도 여러 차례 암살에 대비할 것을 강청하곤 했다.
이처럼 암살 위협을 받아 오던 백범은 1946년 부활절을 맞아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하듯 성결교 잡지(현재도 발행 중)인 <활천 230호>에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게재하였다.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로 세워갑시다: 백범의 유언’
“어떤 이들이 나를 암살하려고 한다는 밀고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기뻐합니다. 나는 총을 여러 번 맞아보았고 지금도 내 몸 속에 총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임으로 거짓 없는 내 양심은 내 죽음을 초월하여 나라를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요 12:24)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여러 교회들이 눈물을 흘려 기도하여 준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 나는 피를 흘리리니 이 눈물과 이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 봅시다.”
청년의 때에 동학혁명 선봉대장(청년 접주)을 시작으로 평생 ‘사선(死線)의 삶’을 살아 온 백범은 사실상 <유언장>이 된 이 기고문을 통해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고자 생각하니 죽음이 도리어 기쁘다”고….
성령이 임하면 함께 임하는 예수님의 권능(행 1:8)이 없이는 불가능한 ‘신앙고백’이다.
성령이 임함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이요, ‘하나님 나라가 임함이 곧 영생이 임함’이니, 담대한 기쁨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된 자신의 ‘믿음’을 백범은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주일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가기 위해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불우한 학생들에게 전해 줄 장학금 봉투에 넣을 편지를 쓰고 있다가, 안두희가 쏜 4발의 흉탄을 맡고 소천하였다.
반민족세력의 사주를 받은 총구 앞에서 비서들을 부르는 한 가닥 비명 소리도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것이다.
암살범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informer) 및 정식요원(agent)이었다는 신뢰할 만한 문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부터 공개된 만큼, 어느 때엔가는 백범 암살의 진상이 보다 명료하게 밝혀지지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을 하나님 나라로 세워가라’는 백범의 유언을 빌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명령하신 소명에 한국 교계와 크리스천들이 기쁨으로 순복하였으면 하는 마음이 실로 간절하다.
성령의 ‘권능’으로 경험된 진리 가운데 교회가 살아야 나라와 민족이 산다
끝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을 자원하는 사도(使徒)의 심정이 응축된 백범의 유언 중 한 구절을 주목한다.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부분이다. ‘나와 같은’이 아니라 ‘나 이상’이라 했다.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 ‘그(내가 한 일) 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는 예수님의 유언과 맥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백범도 후진들이 자신 이상의 일, 더 큰 일을 해내기를 간구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면서, 오늘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소위 지도층 인사들이 ‘백범 이상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반문해 본다.
백범 ‘이상’은커녕 백범 ‘수준’의 지도자들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백범의 유언’대로 백범 ‘이상’의 지도자들이 나와 ‘세계의 중심이 되는 한민족’ 시대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도는 한 가지다.
‘거룩한 공교회’들이 성령이 살아 역사하는 사역과 교육을 통해 백범과 같은 ‘사즉생(死卽生)’의 결단을 가지고 성령 하나님의 뜻에 순복(順服)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대한민국 각 분야 지도자들로 배출하는 것이다.
유창한 성경 지식(말)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고전4:20) 경험된 진리 가운데 교회가 살아야, 나라와 민족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홍원식
법학박사, 통일헌법학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