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헬라어의 ‘시간’과 타노스, 타나토스
헬레니즘 세계에서 시간에 관한 개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호라(ὥρα). 호라는 단순한 ‘시(時)’를 뜻하는 시간 개념이다. 1시, 2시, 3시…, 13시, 14시라 할 때 쓰는 말이다. ‘때(시간)’로 번역할 수도 있다.
둘째 크로노스(Χρόνος). 크로노스는 호라보다 형이상학적인 시간 개념이다. 마치 기관차와도 같은 시간이다. 정해져 있고,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이 시간은 자녀를 잡아먹는 의인화된 농경신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셋째 카이로스(καιρός). 카이로스도 크로노스처럼 호라보다 형이상학적 시간이다. 특히 사건으로서의 시간 개념이다. 그래서 크로노스를 끊어버리거나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크로노스는 수평적이지만,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연상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다.
그리고 넷째 헤메라(ἡμέρα). 헤메라는 호라처럼 단순한 시간 개념인데, 1시, 2시, … 가 아니라 ‘날’의 개념이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했을 때 바로 이 헤메라와 호라를 쓴다. 추상적인 시간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날짜와 시각을 모른다는 뜻이다.
대단원의 막을 내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절대 악의 화신 타노스(Thanos)는 ‘죽지 않는 자’, ‘영원 불멸’을 뜻하는 아타나시오스(Αθανάσιος)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타나시오스는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스(θανατος)와 그것을 부정하는 접두사 ‘α’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다섯 번째 시간 개념이 나온다.
타나토스, 즉 ‘죽음’이라는 시간 개념이다. 타나토스의 기호는 ‘긴 낫’이다. 그 모든 시간을 갑자기 종식시키고 ‘베어버리는’ 권능의 시간으로 임한다. 영원성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노스 자신은 언제나 정의롭다. 왜냐하면 인구의 절반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새로움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기관차 같은 시간 크로노스,
그 기관차를 정지시킬 수 있는 사건 카이로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베어버릴 수 있는 타나토스에 비하면,
헤메라(날)와 호라(시)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시간인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다름 아닌,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을 때, 바로 이 ‘헤메라’를 쓰기 때문이다.
기관차 크로노스와 사건의 시간 카이로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베어버리는 타나토스를 단번에 미궁에 빠뜨릴 수 있는 시간의 권능은, 바로 이 헤메라와 호라인 것이다.
이 헤메라에 정관사 호(ὁ)가 붙으면 ‘쎄메론’(σήμερον) 즉, ‘오늘’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했을 때, 바로 이 쎄메론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여섯 번째 시간 개념으로, ‘사랑’과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하루가 천 년 같고…”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ἀγαπητοί)…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아라”.
※ 여기서 ‘이 한 가지’, 헨 투토( Ἓν τοῦτο)는 천 년의 힘이 아니라, 하루가 갖는 힘을 지시하는 대명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