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기생충>(下)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영화 평론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주에 이어 한국 최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을 분석합니다. <기생충>에는 봉준호의 페르소나 송강호(기택)를 비롯, 장혜진(충숙), 최우식(기우), 박소담(기정), 이선균(박사장), 조여정(연교), 이정은(문광), 정지소(다혜), 정현준(다송) 등이 출연했습니다. 배우 박서준도 까메오로 출연했지요. 스포일러와 갖가지 해석이 난무하는 가운데,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2주간 이어지는 이 평론에는 스포일러가 거의 없습니다.-편집자 주
◈질투심과 계급 투쟁: 공산주의 사상과 한국인의 집단적 평등주의의 결합
영화 <기생충>이 다루고 있는 계급투쟁이라는 주제는 공산주의 사상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런데 1989년 데탕트 이래, 전 세계적으로(특히 유럽대륙에서) 공산주의 정치 체제는 대부분 붕괴되었다.
현재까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몇 개 되지 않는데, 그 몇 되지 않는 나라들 대부분이 유교 문화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 국가들이다.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를 제외한 중국, 북한, 라오스, 베트남이 현재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공산국가들이다.
이 가운데 중국, 베트남, 라오스는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상당부분 받아들였으나, 정치나 사회, 문화 전반은 여전히 공산주의 요소들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은 두말 할 나위없는 골수 공산정권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선 후 소련의 힘에 의존하고 있던(혹은 소련에게 지배당하고 있던) 유럽 공산국가들은 체제변화가 가속화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부터 등소평의 지도 하에 자본주의 경제요소를 받아들였던 중국은 소련이 겪었던 극심한 내홍을 겪지 않고(물론 1989년의 천안문 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주변 공산국가들은 지금까지도 공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치적 배경은 그러하지만,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유독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 덕분에 공산주의 통치 체제가 동아시아 지역에 상당히 오랜 기간 안착해 있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체제로부터의 이탈과 개별화를 억제하고 전통과 구습을 중시하며, 창의성을 낯설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온 동아시아 문화는 무조건적 평등과 집단주의를 표방하는 공산주의 사상과 쉽게 어우러질 수 있었다.
계급 투쟁을 조장하는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의 질투심과 깊게 연관돼 있다. 애초 공산주의 사상의 창도자 마르크스가 겪었던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현실은 경제적 정의가 한없이 결여되어 있던 시대였고, 유산계급, 부르주아, 자본가 등에 대한 도시노동자 및 영세농민들의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있는 상태였다.
공산주의 사상은 일면으로는 빼앗긴 노동자들의 권리, 즉 생산수단을 공평하게 소유할 권리의 회복이라는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정의를 이행하는 원동력으로 격정적인 분노와 질투심을, 그리고 그 수단으로는 폭력 혁명을 지목하고 권장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정신과 정반대되는 면모를 보인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회적-경제적 불의의 상황이 닥칠 때, 내세에 대한 소망을 바탕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도우심이 임하기를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공산주의가 이처럼 사회적-경제적 불의의 상황에서 기독교와 정반대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을 세계 이해의 방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불의한 현실을 타파할 수단은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신적인 역사(役事)가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의 힘뿐이라는 무신론적 사고가 바탕에 자리잡고 있고, 이로 인해 계급투쟁을 힘있게 끌고나갈 수 있는 온갖 양태의 물리적-정신적 원동력이 모두 긍정되는 것이다.
질투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부유한 자들은 누리는데 나는 누리지 못하는 혜택들, 그것을 앞에 두고 인간이 느끼는 박탈감과 분노를 십분 이용하라 권고하는 것이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파간다는 특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한국민들에게, 그리고 평균화된 집단주의를 선호하는 동아시아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 듯 하다.
한국에 들어온 공산주의 운동, 혹은 그보다 완화된 사회주의 운동이 유독 기형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바로 한국인 특유의 ‘선험적’ 죄성으로 자리잡아버린 이 극심한 질투심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자본가의 횡포로부터 노동자를 자유롭게 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되찾아 주라고 결성된 노조가 스스로 귀족화되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일자리를 친족들에게 세습하는 행태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마르크스가 이 상황을 봤다면 이들 귀족노조를 ‘신흥 자본가 집단’이라고 비난했을지 모른다.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혜택받는 이들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질투심을 갖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보다도 못한 서민들에 대해서는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해 그들이 가져야 할 작고 정당한 권익들조차 빼앗으려 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생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영화는 기태 가족의 사기와 범죄 행각을 통해 한국 사회 하층민들 사이에 만연돼 있는 이런 기생충스러운 행태를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물론 서민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게 된 많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기득권층에게 부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는 부조리한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하향 평준화를 평등의 진면목이라 우기는 한국인 특유의 소모적 집단주의와 그 뒤에 감춰져 있는 극심한 질투심이 한국의 부조리한 사회적-경제적 현실을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의 이유 중 기득권층과 서민층 간의 갈등을 일차원적이고 이분법적인 선악논리로만 판단하려 하지 않고,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방식으로 고찰해 보려 했다는 점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더해 유독 프랑스 문화계와 유대감이 깊은 봉준호 감독의 문화적 스탠스도 수상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봉 감독이 연출했던 대표작 <설국열차>는 원래 프랑스 만화가 원작이었고, 때문에 한국 이외의 국가들 가운데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바 있다.
어쨌든 봉준호 감독은 이번 작품 <기생충>에서 계급투쟁이라는 주제적 프레임을 가지고 단편적인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연출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삶의 현실과 대인관계에서 확인되는 비틀린 정서를 드러내려 힘쓰고 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좌우 논리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성실한 현실 비판을 수행하려 힘쓰는 모습을 보인다.
봉준호 감독이 비판하는 한국인 특유의 질투심과 집단적 평등주의는 사실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큰 악영향을 미친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갈수록 ‘젊잖고 세련된’ 믿음의 모습을 강조하며, 이전의 한국교회가 고수했던 ‘유별나게 믿는 믿음’을 도태시키려 애쓰고 있다.
성경공부와 기도와 헌신에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남보다 ‘튀는’ 믿음이 눈총을 받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현실은 사실 한국인 특유의 질투심 충만한 심성이 만들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누군가가 나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기도응답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질투가 나서 참기가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사실 그처럼 유별나게 믿는 이들 덕분에, 그들이 핍박과 오해를 무릅쓰고도 믿음을 지킨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사회에 만연한 평등주의적 사고에 휘말려, 점차 그 기반이 된 순전하고 열심 있는 믿음의 가치를 폄훼하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신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대형교회 선호 현상은 대체로 대형교회 목회자의 열심 있는 신앙을 사모해서라기보다, 대형교회가 보장해 주는 익명적 교회생활에 안주하려는 욕심 때문에 발생하는 듯 하다.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거부하는 ‘가나안 성도’ 현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특유의 선험적이고 고질적인 죄성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고유한 모습의 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인에게는 유독 질투심과 집단적 평등주의가 뒤섞인 저열한 심성이 큰 문제가 되고 있고, 이를 영화 <기생충>이 절묘하게 조명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심성을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중국의 전국시대 월왕 구천의 성품에 대한 월나라 재상 범려의 평가에 빗댈 수 있을 듯 하다.
중국 명나라 시대에 집필된 역사소설 동주 열국지(東周 列國志)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월왕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으로, 복수와 집념의 대명사와 같은 군주이다. 범려는 이 구천을 도와 월나라가 오나라에 정복되며 받았던 수모를 되갚도록 도운 명재상이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이 오나라에 설욕하자마자 월나라 재상 자리를 버리고 재야로 잠적해 버렸다. 그가 벼슬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떠나며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그는 구천에 대해 “고생은 함께할 수 있으나, 영화는 함께할 수 없는 군주”라는 평을 내린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적한 범려를 제외하고 구천을 보필했던 중신들 대부분은 역모 혐의를 쓰고 처형당한다.
구천이 집념을 갖고 국력을 키우고 투쟁한 이유가 결국 자신보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 시기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범려는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국인들의 기본적인 심성이 이와 비슷해 보이는데, 함께 힘들 때는 서로 독려하고 응원해 주지만, 누구 하나가 성공을 거두면 극심한 질투에 휩싸이는 점이 특히 그렇다.
그러고 보면 영화 <기생충>은 작년 개봉해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영화 <완벽한 타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두 영화는 한국인 대부분의 마음 속에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고질적 죄성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완벽한 타인>이 한국 특유의 허세와 체면문화에 대해 폭로하고 있다면, <기생충>은 질투심과 평등주의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폭로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부정적 심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체면과 허세는 결국 남보다 못나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집단적 평등주의는 남이 나보다 잘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결국 둘 모두 그 원동력은 질투심에서 비롯된다. 이런 심성은 기본적으로 사람됨을 위해서든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든,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이 사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가운데, 한국인들의 선험적 죄성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반성할 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