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현충일과 초대교회 병역 거부, 그리고 순교자
6월 6일, 세바스티아누스.
영어식 이름으로는 세바스찬이라 불리는 이 인물은 남부 프랑스의 나르본 태상으로 3세기에 태어나 군인 신분으로 순교한 인물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군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시성해 놓고 있다.
당시 지체 높은 기독교인 가정의 쌍둥이 형제 마르코와 마르첼리아누스의 순교를 격려하고, 호민관이었던 니코스트라투스와 아내 조아(Zoa), 집정관이던 크로마티우스와 그의 아들 티부르티우스까지, 다 이 사람에 의해 개종도 했고 순교까지 했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고위 군 장교였다.
바로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친위대 대장이었다.
디오클레시안은 그가 기독교인인 줄 모르고 친위대 대장에 임명했는데, 나중에 기독교인임이 드러나자 처형을 명했다고 전한다. 그를 그린 대부분의 그림 도상에서처럼 그는 화살을 맞는 처형에 처해졌는데,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가서 보니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치료를 받고 회생한 그는 도망치지 않고 다시 디오클레시안 황제에게 찾아가 기독교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그의 잔인성을 규탄했고, 그 바람에 다시금 태형에 처해져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맞아 결국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라 불리는 로마의 하수구에 버려졌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로마 박해사화에 따르면, 디오클레시안은 10대 박해 가운데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극렬했던 박해 시기에 해당하는 황제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디오클레시안은 그렇게 박해를 할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 프리스카와 딸 발레이아도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오클레시안 자신도 왕권에 대한 잦은 쿠데타로 인해 로마를 동서로 분할했고, 사실상 네 명의 황제에게 정권 이양을 마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살상을 즐기는 품성이었다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당시 로마에는 기독교인으로 인한 큰 사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였다.
오늘날 전쟁의 신 여호와를 섬기는 현대 이스라엘에서도, 극단적 종교 정당의 경우 병역 면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네타냐후의 권력 속개에 차질을 빚은 바 있다.
이처럼 당시 로마에서도 진성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병역을 이탈하거나 하는 문제들이 발생하여, 군인 신분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용납이 되질 않던 시기이다.
당시 디오클레시안은 자기를 포함해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사수)’와 두 명의 ‘카이사르(부사수)’ 총 네 명의 황제를 임명해두었는데, 그 중 자신의 부사수인 갈레리우스가 기독교인에 대한 극렬한 편견이 있었고, 결국 디오클레시안을 설득해 디오클레시안 명의의 박해 칙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다뉴브 강 주둔군 안에서 많은 기독교 병사가 처형되었다.
따라서 세바스찬의 캐릭터는 이 모든 기독교 병사의 고난을 표지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이후에 그를 표현한 대부분의 그림은 벌거벗겨진 몸에 화살이 꽂힌 도상을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그의 도상이 변질이 되었다는 데 있었다.
화살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몸의 비틀림이 묘한 자태를 이루는가 하면, 아예 아름다운 미동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 죽어간 수많은 기독교 병사들은 병역 거부자였던 게 아니라, 병역 거부를 할까봐 두려웠던 지휘관들의 편견에 의해 죽어간 기독교인 순교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동성애자들은 세바스찬을 아예 자신들의 병역 기피의 수호성인으로 찬탈을 해갔던 것이다.
그것이 이 용맹스러운 세바스찬의 고통의 몸짓을, 교태로 둔갑시키고 만 것이다.
2019년 현충일, 우리나라를 지킨 순국선혈의 고통의 몸부림을 수치로 둔갑시키는 세력이 있다.
군 장성의 인권을 파괴하고서도 미안한 줄 모르는 동성애자와, 그런 자들을 앞세워 변치 않는 충성을 유린하는 권력과 정치인 일부.
P.S. 참고로 초기 기독교인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어거스틴의 정전론(正戰論)에 힘입어 근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