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지혜와 명철
지혜와 명철은 어떻게 다른가. 유대인의 경전에서 지혜는 명철보다 다섯 배 이상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그러나 지혜의 5분의 1밖에 안 나오는 명철은 마치 지혜가 지식을 윤기나게 하듯, 지혜를 빛나게 하는 절대 요소이다.
그래서 지혜는 명철을 본거지 삼는다는 표현도 있는 것이다(잠 8:12). 그런가 하면 지혜는 호출하는 주체요, 명철은 대답하는 객체라는 표현도 다 같은 맥락이다(잠 8:1).
그런데 이 명철을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로 옮길 때 ‘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번역한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프로네시스는 아리스토털레스의 윤리학에서 테크네(예술), 에피스테메(인식), 누스(정신), 소피아(지혜)와 더불어 5대 덕목으로서 ‘실천적인 지혜’를 일컫는 말이다.
소피아 지혜는 이론적 현명함이지만, 프로네시스 명철은 실천적인 지혜인 것이다.
윤리적인 덕을 뜻하는 아레테(arete)와 비교해도, 아레테가 타고난 본성적 덕을 표명한다면 명철의 프로네시스는 실천을 표지한다.
이렇게 개념적으로만 설명하면 난해할 법한데, 유대인의 경전에는 이 지혜와 명철의 스토리텔링을 보전해놓고 있다.
바로 솔로몬의 재판이다.
경전은 이 유명한 재판을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하사받고 난 직후의 모종의 현상으로 예시한다.
두 명의 창녀가 송사를 청한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하나는 착하고 다른 하나는 악한 여성인 게 아니라, 둘다 몸 파는 여성이다. 어떤 사연으로 고대 사회에 몸을 팔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 여성은 자면서 자기 아기를 깔아뭉게도 모를 정도로 둔감하게 잠을 자는 여자이고, 다른 한 여성은 비록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를 자기 아이를 잘 보전했다.
텍스트가 아닌 기억에 의존해 이 이야기를 떠올릴 것 같으면, 두 여인이 살아있는 한 아기를 재판정에 데려온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아래 그림과 같이 죽은 아기와 살아 있는 아기, 두 아이를 같이 데려와 저마다 살아 있는 아기가 자기 애라고 탄원하는 장면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떠올린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쪼개라!”
이 때 왕은 모계의 본성을 자극하는 꾀를 생각해낸 듯 양보한 여성을 친모로 확정짓지만, 사실 이것은 양보의 미덕으로 식별을 한 것이 아니라, 한 여성에게서 나는 명철의 소리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 명철은 솔로몬의 지혜를 선행한다.
즉 다시 말하면 명철이란 생모를 드러내는 모종의 꾀로서 임한 게 아니라, 과감하게 친자를 포기하는 생모의 명철로서 그 스스로 생명의 소리를 자아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천의 선구조가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잠 8:1)”라는 문장을 낳았다.
정치학 개념이기도 한 이 프로네시스(명철)를 현 정권에 적용하면 더욱 단번에 이해가 빠를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의 토대가 죽은 아이들을 향한 “미안하다. 고맙다”로 발호됐기 때문이다.
친부 또는 친모는 이런 이중의 언어를 못 쓴다. 왜냐. 명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 생부와 생모의 마음을 알아 내기 위해 하나님에게 구할 때, 사실은 지혜 소피아가 아닌 듣는 마음 또는 이해하는 마음(understanding heart)을 구하였던 것이다(왕상 3:9, לֵב שֹׁמֵעַ.).
이 명철로 번역된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는 심장 근처에 위치한 횡경막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명철과는 괴리되는 숱한 공감 부족의 현실 정치가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