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고레스에서 콘스탄틴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적성국 땅을 밟은 일로 실망들이 이만저만 아닌 가운데, 유독 종교적 고리 안에서만큼은 ‘우리 고레스 대왕에게 뭔가 깊은 뜻이 있겠지’ 하는 미신적 태도로 일관하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크 라깡의 가르침처럼, 문재인 대통령의 실상은 그런 욕망의 덩어리를 만들어낸 욕망의 주체인 우리 국민들이 더 잘 알 수 있듯, ‘트럼프 쇼’의 향후 추이는 그를 만들어낸 미국인들이 더 잘 아는 것 같다.
워싱턴포스트(WP)는 ‘끔찍한 트럼프와 북한의 거래가 물 건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제하로, “북한과의 관대한 협상의 속삭임이 대체 무슨 대북 정책인지를 알지 못하겠다”며 불확실성을 토로하고 있다. “트럼프가 단지 사진 촬영을 위해 항복하러 갔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라며, “정보 능력이 떨어지는 일부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만이 ‘승리’로 보게 만든 쇼”라고 혹평했다.
폭스 뉴스의 경우는, 트럼프의 행동과는 다른 입장의 미 정보 당국 의견을 주로 다뤘는데, 국방 정보국장이 실명으로(Robert Ashley Jr.) 등장해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세계를 위해 좋은 날”이라 했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며 북한 군부는 계속해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그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서, 북한의 의도는 오로지 “지상에서의 실측 정보”만이 신빙성 있다는, 이번 트럼프 대통령 행보와는 다른 관료 목소리로 실었다.
비교적 쉬운 영어를 쓰는 USTODAY는 한층 신랄하게 보도를 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서 벌이는 스펙터클한 광경(다들 리얼리티 쇼라 부르는 걸 이렇게 부른다)은 그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미국을 저해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실례”라 평가하면서,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에 대한 국내 관심을 끌기 위한 대규모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에는 영국 여왕과 식사하는 광경을 보여주러 런던에 갔지만 실상 정부와 의미 있는 토론을 할 수 없었고, 또한 푸틴 대통령과의 실효 없는 회담 역시 꼬집어 가면서 북한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실효가 없을 뿐 잠재적으로는 미국의 이익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자신을 위한 선전보다는 북한의 김정은을 띄워주는데 기여한다는 사실에 우려를 표한 이 신문은, “핵 동결에 방점이 있을 것 같다”는 NYT를 인용했다.
여기서 인용하는 NYT는 이런 논평을 낸 바 있다.
“트럼프가 비무장 지대에 들러 김정은에게 ‘Say Hello(손을 잡고 인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트위터의 제안으로 시작한 이번 만남이 있기 몇 주 전, 모종의 협상 라운드를 위해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는 진정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개념은 핵 동결, 즉 본질적으로 현 상태를 수용하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행정부 관리들은 종종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을 적어도 미국의 국익이라 보는 것만큼은 무리가 있다. 그것은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임기 중반을 향해 건너가는 대통령이 느끼는 초조함의 발로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는 행태의 아류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떤 미국 오피니언들 사이에는 이번 쇼를 공화당 매파들이 버락 오바마를 이란과 묶어 협박한 것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업으로 보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이번 쇼를 저지르는 동안 존 볼튼(John Bolton)을 몽골로 보냄.)
대체로 이런 정도가 미국 내 주요 사설을 정리한 것인데, 대체로 좌경향인 이들 언론들이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우려하는 추이는 사실 역설적인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이고도 우려스러운 이 행보를 한국 내 좌경향 언론들만은 고무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이 대조적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과연 개신교 예배당에 가서 기도도 받고 하던 우리의 ‘고레스 대왕’의 속내와 그 실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유대인 경전에 나오는 히브리인처럼 어느 한 곳 기댈 데라곤 없는 우리 같은 약소국의 신앙인들이 미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의 인성이나 정치적 수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세계 국가’의 지도자들이 직면한 크고 작은, 또는 극히 사소한 일(deed)에서 순환되어 온 역사가 갖는 수레바퀴 구조에 기초할 뿐이다.
이는 속칭 뇌피셜(뇌(腦)와 오피셜(Official, 공식 입장)의 합성어. 자기 머리에서 나온 생각을 사실이나 검증된 것인 양 말하는 행위를 일컫는 속어)이나 종교 미신과는 좀 다른 영역이다.
실제로 로마에서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고 홀로 남겨진 유부녀를 강간한 섹스투스 사건을 기화로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제우스를 믿는 신도들에게 살해만 당하던 기독교인들이 도리어 역전해 이교도 신전을 약탈하고 방화를 저지를 수 있도록 ‘특권’을 가져다 준 것은 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이라는 일개 지역 장수가 꾼 꿈 한 토막 때문이었다.
꿈의 효과가 아니라,
꿈의 기능이 그렇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중요)
사실 고레스의 유대인 해방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 격이라고 한다면, 콘스탄틴의 기독교 이야기는 우리 시대와 훨씬 근접거리에 자리한 다큐와도 같은 것이다.
왜냐. 오늘날의 트럼프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것처럼 콘스탄틴을 반신반의해하는 견해들은 1천여 년간 이어온 주제였기 때문이다. 과연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이었느냐는 것이다.
과연 트럼프에게는 기독교 의식이 있는 걸까?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하기에는, 다음의 문제들이 있다.
이교도 사제들의 수장으로서 이교도 제의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살아생전 기독교 양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당시 신자의 표인 세례도 받은 적이 없다(죽기 전에 달랑 받음).
그래서 사람들은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이용하기만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기독교(특히 개신교) 내에서는 콘스탄틴을 이단의 교주처럼 가르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하기에는, 다음의 문제들이 있다.
우선 콘스탄틴 당시의 기독교도는 그렇게 든든한 후원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콘스탄틴 같은 능력자에게는 당시 반(反) 기독교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 물질적 후원으로나 인력으로나 우세할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독교도는 대부분 병역 기피자들이었는데, 군인인 콘스탄틴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리고 과연 콘스탄틴에게 신앙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상대적인 비화에서 알 수 있는데, 그의 적수인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의 군대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자기 병력들에게 이르기를 “제군들, 콘스탄틴의 XP 깃발을 쳐다보지 말고 싸워라!” 명했다고 한다.
즉 다시 말해 콘스탄틴에게는 적어도 그의 적수에게 있던 XP(그리스도) 깃발에 대한 미신보다, 능가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추론 가능한 대목이다.
사실, 콘스탄틴의 이와 같은 신심(그게 미신일지라도)에 기반한 종교정책은 비록 기독교에 막대한 세속화를 불러오긴 했지만, 수많은 이단들을 혁파시킬 수 있는 정신적 르네상스 시대 천년을 여는 결과를 도래시켰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종말을 콘스탄틴 교회(가톨릭, 개신교 포함)의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레스에서 콘스탄틴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것이다.
“한 남자의 심장이 자기의 길(δίκαια)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이 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이 연출하는 것이다(잠언 16장 9절, L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