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 (18)
우리는 지금까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으려면 마음의 상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거나 선을 위해 모든 고난당하기를 원해야 한다.
이번 시간에는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누어 보자.
모든 것을 행하기 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이 모든 것을 다 언급해야 하는가? 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다양한 것들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천의 옷을 입으라고, 때로는 모든 재물을 버리라고, 때로는 명예를 버리라고, 때로는 아버지를 장사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눅9:59).
반대로 선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힘과 권력을 이용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맡겨진 재물에 충성하라고(마25:21), 최고의 명예를 얻고 이 자리를 이용해 선을 행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하여튼, 모든 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부적인 것들을 끄집어내기보다,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그 본질에 있어 일치와 동일함으로 단순화해 보자.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리해 보자.
“모든 것을 행하기 원하는 것이란 선에 충성하고 충성스럽게 남기 원하는 결단이다.”
이 결단이 본질적으로 한 가지인 것처럼, 이 결단이 결정적인 전부다. 그때 속 좁은 사람들의 엉뚱한 지위 경쟁을 위한 어떤 유혹의 때도 없다. 그때 우리의 이 이야기는 더 짧아질 수 있다. 다양한 것들의 많은 이름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진리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이 본질적인 간결성은 삶 속에 현존하고 있는 간결성, 선에 충성하고 충성스럽게 남기를 원하는 결단의 행위 속에 있는 이 장엄한 간결성과 일치하니까.
다시 말해, 누구도 이것을 지루하고 장황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반대로, 이것은 영원의 의미에서 축소다.
내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인생의 모든 단편들을 축소시키는 것이다(영원의 길이는 진정한 단축이니까). 이것은 인생의 모든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확보된 것은 선에 충성하고 충성스럽게 남기 원하는 결단을 통해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고 불평할 때, 그들에게 많은 시간이 걸리게 하는 것은 우유부단함, 산만함, 망설임, 미지근함, 결단성 부족과 같은 것들이다. 한 마디로, 결단하지 못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선에 충성하고 충성스럽게 남기 위해 결단한 사람도 모든 종류의 일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다. 아니, 그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한 가지만을 마음에 품고 있으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모든 종류의 일을 다루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선을 위한 많은 시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선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한 결단이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결단을 밖에서 심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결단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결단은 진리 안에서 생성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결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요구된다.
이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다. 여태껏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나 가장 비천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이 결단은 똑같이 요구된다.
이 영원의 결단이 가장 높은 자와 가장 낮은 자를 똑같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태양이 농부의 오두막집과 왕의 궁전을 똑같이 비출 수 없다.
똑같다고? 아니, 엄밀한 의미에서 똑같지 않다. 가장 높은 자?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모든 것을 행하기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진노함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왕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마침내 햇빛을 속여 가난한 오두막집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그의 궁전을 비치게 할지라도, 선과 영원은 결코 이런 식으로 속을 수 없다.
이 요구는 누구나에게 똑같이 같다. 곧, 모든 것을 하기 원하는 것.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 선은 이 결단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 복을 비춘다.
문제는 이 결단을 추천할 수도, 이 결단을 훔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인생을 살금살금 기어가려 한다면,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자. 다만 기도할 뿐이다.
진리가 그를 사로잡을 기회를 얻어 그가 선을 위해 결단을 품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가 그를 어떤 술책으로 현혹하여 인생을 살금살금 기어가는 중에, 이 결단을 갖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게 하자.
하지만 그를 누가 도울 것인가? 그가 그렇게 멀리 모험을 할 때, 그가 신뢰했던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누가 도울 것인가?
이 분은 약한 자를 돕고 있는 더 강한 자와 같지 않다. 오히려, 무익한 종이 주인의 뜻을 행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행할 때, 돕는 자와 같다(눅 17:10).
그때 그는 초인간적인 모험을 한다. 모험을 하는 자가 갖고 있는 믿음이 초인간적인 힘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이것을 이해할 수조차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정확성인가!
보라, 전함은 저 깊은 바다로 나가기 전까지 그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반면, 범선은 미리 모든 것을 안다.
영적으로 이해할 때, 모든 것을 행하기 원하는 자만 저 깊은 바다로 간다. 그는 가장 걸출한 자가 되든, 가장 비천한 자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범선은 영리한 자다. 그는 가장 걸출한 자가 되든, 가장 비천한 자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은 전함인가 범선인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