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시면서도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고 시사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돈 곧, 부 그 자체는 '중립적(中立的)'이라는 사실은 알 필요가 있다. '같은 돈'도 쓰는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고 맞지 않고'가 결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을 이야기한다.
유일한은 성공한 상인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 유기연 씨의 장남으로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외국 선교들이 평양에서 전도를 하면서 서양 문물을 전하고 있었고, 이승만 등 젊은 애국지사들이 여기저기 순회하면서 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을 외국에 보내 서양의 문물을 배우게 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개화입국론(開化入國論)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 이끌려 애국심이 강한 유기연은 1904년에 9살에 지나지 않은 아들을 순회공사 박장연 씨에게 맡겨 미국으로 보냈다.
유일한은 미국행 배 안에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잃어버렸다. 그는 네브라스카에 정착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자매(姉妹) 가정에서 살면서 고학으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5년에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다닐 때는 중국 등에서 값싼 제품을 사다가 동양인들에게 팔아 학비를 마련하는 등 장사 수완을 발휘했다. 191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GE(General Electric)에 입사해 잠시 회계사로 일했다. 이 무렵 학창시절에 알았던 중국 광동 출신의 의학 전공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했다.
유일한은 1919년에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필라델피아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이 때부터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유일한은 GE에서 잠시 일하다가 그만두고 1922년에 대학 친구와 합작으로 '라·초이식품회사'를 차려 자신은 부사장이 되었다. 그는 중국요리에 많이 쓰이는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숙주나물 공급으로 돈을 벌기 위해 식품회사를 차렸다. 그는 숙주나물 원료인 녹두를 확보하려고 1925년에 조국을 찾았다.
유일한은 북간도로 이주한 부모님을 만나려고 그곳에 가는 도중에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 당시 조국에는 철마다 찾아드는 돌림병, 각종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등이 창궐하고 있었는데도 치료할 약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제약회사 설립을 결심했다. 미국에서 5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갖고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1936년 유한양행은 경성방직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주식회사로 등록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도산 직전까지 갔고, 한국전쟁으로 회사는 잿더미로 변했다. 1953년 복구 작업과 미국의 원조로 1950년대 말 한국 최대의 제약회사로 거듭났다. 유한양행은 1954년에 부천에 기능공 양성학교 '고려공과학관'을 설립했고, 1964년에 유한공업고등학교로 개명했다. 1965년에 '유한교육신탁관리기금'을 설립하여 장학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열중하다가 이후 '유한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일한은 1971년 7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 전부를 공익법인에 기증했다. 그의 경영 이념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는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이 이를 밝혀주었다. 유언장에 따르면, 손녀를 위한 학자금으로 자기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당시 환율로 3백만 원에 해당하는 1만 달러를 마련하고, 딸에게는 유한중·공고 내의 묘소 및 주변 대지 5천 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을 만들고, 자신의 소유주식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한다'고 되어 있었다. 또 미국에 있는 장남에게는 '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만 남겼다. 그로부터 20년 후 1991년에 세상을 떠난 딸 유재라 여사도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일한은 50년간 맡아온 CEO를 물려주는 자리에서 후임 조권순 사장에게 1968년에 받은 국내 최초의 '동탑산업훈장'을 주면서 '정직함을 상징하는 이 메달을 대대로 이어갈 사장에게 전달하라'고 당부했다. 유한양행은 조순권 사장부터 유일한 사장과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회사를 경영해 오고 있다. 이 점을 한국사회는 높이 사고 있다. 유한양행은 현재 국내 매출 1위 제약사다. 유한양행은 2019년 전반기 전후 8개월간 3조 원이 넘는 수출 실적도 이루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기업을 투명하게 운영한 기업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직하게 세금을 납부하고, 마지막에는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대부분 사회에 환원한 기업인이다.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는 돈 곧, 부 그 자체는 중립적임을 보여준 기업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