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칼럼
2. 영원한 안식의 확신과 근거 (23:6)
시편 23편의 마지막 부분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마쳐지고 있다. 여기에서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의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 민족이 더불어 모여 예배하는 거룩한 성소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유목민들의 초라한 천막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바뀌게 된다. 성전의 일차적인 중요성은 성전의 외적인 건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임재에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확신에 찬 이러한 고백 속에는 사막과 같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히 계신 성전을 바라보는 신앙적 열망이 나타나 있고, 그것은 또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을 내다보는 신앙적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삶의 현재성과 더불어 소망의 영원성을 보여주면서 신앙의 양면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러면, 삶의 모든 것에서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확신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한 확신은 자기 자신에서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있음을 이 시편 저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편 23편의 핵심적 주제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과 감사의 찬양시라고 할 수 있다.
(1) 여호와의 선하심
선하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투브'인데, 이 단어는 '좋음, 선함, 유익함, 유쾌함, 호의, 상량, 옮음, 행복함' 등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들은 실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것을 포함하여 매우 광범위하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할 때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사용이 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느 9:25).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우심이다(사 63:7; 시 25:7; 시 145:7).
마지막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시 31:19).
(2) 여호와의 인자하심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인자, 자비, 사랑, 친절'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헤세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 언약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신데, 그러한 이러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을 '헤세드'라고 하였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이 '헤세드'를 stedfast love (변함없는 사랑), unfailing love (실망 없는 사랑), loving kindness (자비로운 사랑), mercy (자비)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이 언약의 동반자로서 본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해도 언약의 한쪽 파트너이신 하나님 자신은 결코 언약의 관계를 파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중단 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헤세드' 곧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신약에서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과연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배경이 된다.
여호와의 '선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과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시는 근거가 되고 있다(신 7:6-8). 동시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맺어진 언약 관계가 지속하여 유지되는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이며, 또한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확신의 근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