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주 전만 해도 비장한 기개로 우리 국민 앞에 서서 ‘서해맹산’의 결기를 다짐하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가, 지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쉴 새 없이 뉴스를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여·야, 좌·우를 막론한 여론이 수많은 부적격 사유를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도 곤혹스러운 빛 역력하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행정부 관료의 자격 심사를 지나치게 도덕적 기준으로 판가름하는 것은 막대한 사회 비용을 치러야 하는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조 후보자 본인이 과거 정부 인사 검증 때마다 그들의 도덕성을 지탄하면서 스스로 정의의 표상으로 각인된 터라 국민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 후보자 자신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인사들의 도덕성만도 못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검증의 과정이 맹목적인 진영 구도로 옮아가는 현상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법적 책임 문제까지 거론되는 관료 후보자를 향한 맹목적 신임만을 부추기는 한 여류 작가의 입장은 그 단적인 예이다.
바로 소설가 공지영 씨의 주장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의 법치를 관할하는 법무부 장관 임명을 대하면서, 그녀는 “(조국, 지지한다…) 정말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을 위한 공정한 법 집행관으로 임명되어야 할 장관 임명을 두고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일까. 법무부 장관은 국민을 이겨야 하는 자리인가.
대다수 국민의 납득할 수 없는 자격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여류 작가의 맹렬한 지지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불과 2주 만에 뒤바뀐 ‘서해맹산’의 결기가 이 여류 작가와 같은 맹목적 지지만을 남기게 된 사태를 바라보며 문득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그 진정한 해제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서해맹산’에서 접하는 오이디푸스는 결코 뜬금없는 연상만은 아닐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를 만나는 대목이다.
‘스핑크스’라 하면 우리는 단지 이집트 유적지에서 만나는 반인반수의 형상만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스핑크스(Σφίγξ)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스핑크스이다.
남성성의 스핑크스는 안드로스핑크스(άνδροσφίγξ)라 하여 대개 이집트에서 유래한 것이고, 남성성과 함께 여성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 스핑크스 도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성성을 함께 가진 그리스식 스핑크스가 좀 더 중요한 연원을 갖는다.
이 그리스식 스핑크스는 날개는 독수리 날개요 몸은 사자의 몸일 뿐 아니라 꼬리까지 있는 게 특징이다. 그 꼬리는 독사의 머리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스핑크스인 ‘그녀’는 한 남성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누구냐?”
남성은 단번에 답한다.
“사람이지!”
이 수수께끼를 맞춘 남성은 바로 오이디푸스였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의 답을 맞추자, 그만 스핑크스는 자살을 하고 만다. 높은 데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과연 ‘왜 죽었을까?’ 이 문제는 서양 철학은 물론, 서구 문학을 아우르는 오랜 의제였다.
스핑크스는 대체 왜 자살한 것일까.
1. 자존심이 상해서?
2. 오이디푸스가 미워서?
3. 너무 쉬운 수수께끼를 낸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모두 답이 아니다. 이 신화로 사색해온 문학가들은, 스핑크스가 자살한 이유를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이디푸스가 맞혔지만, 정작 오이디푸스 자신은 자신이 세 발로 걷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의기양양해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자살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 앞에 섰을 때, 오이디푸스는 이미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는 상태였던 것이다. 오이디푸스(Οιδίπους)란 말은 본래 뒤꿈치가 상했다는 뜻에서 온 말이다.
오이디푸스의 상한 뒤꿈치가 상징하는 바는,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의 기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운명을 박차고 집을 나갔지만 결국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이제 스핑크스를 통과해 가고 나면 친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수수께끼를 맞혔다는 그 사실에 의기양양해할 뿐, 절뚝거리며 걷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스핑크스에게 바로 그 모계성의 여성성이 내재하여 있기에, 그 비정한 운명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것, 이것이 희랍의 스핑크스 전설의 결말이다.
바로 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오이디푸스가 짊어진 ‘죄’를 가리켜, 신학은 ‘하마르티아’라 분류한다. 그것은 마치 조 후보자가 ‘서해맹산’의 결기 앞에 섰을 때의 자신감과도 같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조 후보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딛고 선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것은 여론이 제기하는 그 모든 사법적 책임보다 덜 악한 것이지만, 그 모든 악한 책임보다 언제나 가장 선행된 것이기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가장 궁극적인 악의 원천이다.
하마르티아란 바로 ‘무지’인 것이다.
‘서해맹산’을 통해 기자들로 하여금 수수께끼를 못 내도록 제압은 했지만, 자신의 상태는 알지 못하였던 무지.
이 무지의 결함(하마르티아)에 갇힌 오이디푸스를 향해 무조건적인 성원과 애정을 보낼 수밖에 없는 스핑크스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이 여류 작가의 무한한 지지와 성원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의식에서 전가되는 집단적 인식 마비가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