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경전에는 여러 종류의 ‘자유(또는 자유인)’가 있다.
우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을 때의 ‘자유’는 엘레우테로스(ἐλεύθερος)이다. ‘오다’, ‘일어나다’라는 동사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에서 온 말로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자유이다.
다음은 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이다. ‘시민권’이라는 뜻이기도 한 이 말은 시민권자(πολίτης)들이 누리는 자유를 뜻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어떤 로마 군단 대대장이 바울에게 이르기를 “자기는 돈을 주고 ‘폴리테이아’를 샀다”고 말하는 장면이 사도들의 프락세이스(행전)에 나온다.
다음은 게노스(γένος). 이 로마군 대대장이 자신은 시민권을 돈 주고 샀다고 하였을 때, 바울이 “자기는 돈 주고 산 게 아니라 선천적인 로마 시민권자이다”라고 답했다. 이 ‘선천적(태어날 때부터)’이라는 말 게노스가 ‘자유’의 또 한 형식이다.
게노스가 다소 철학적 개념이라면, 종교적인 개념으로 발전한 자유가 있다. 기독교인이 익히 잘 아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이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 때 쓰는 이 ‘디카이오오’가 강력한 ‘자유’의 한 개념이었다. 기독교인이 이것을 ‘칭의’라 부른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사실상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기에,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은 전 서구의 자유는 본질상 이 디카이오오의 세례였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이 자유의 권역에 속해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펠레우테로스(ἀπελεύθερος). 이것은 앞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였을 때의 ‘자유(ἐλεύθερος)’에다 분리를 뜻하는 접두사 από를 붙여 더 심화시킨 자유이다. 실제로 노예였던 사람이 자유를 얻고 ‘자유자’라 칭할 때 이 말을 썼다(참조 고전 7:22).
끝으로 리베르티노스(Λιβερτῖνος)라는 독특한 어휘가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어들과는 달리,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말이다.
1세기 예루살렘에서 국수주의 유대인들과 격론을 벌이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이라는 인물과 그와 비슷한 신분의 디아스포라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을 지칭한 말이다. 이들의 신분은 로마 제국 아래서 노예 신분이었다가, 명시적인 자유의 몸이 된 자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을까.
로마 시대 노예들은 그 계층이 다양했는데, 완전히 하류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 중 재능이 탁월한 노예들은 주인을 효과적으로 보필함으로써, 하류 노예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예술적으로 뛰어났다든지, 지적으로 뛰어났다든지, 회계나 행정면에서 탁월하다든지…. 그런 개인적인 재능을 통해 주인을 영화롭게 하였을 때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됨은 물론, 심지어 정계로 진출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체포되어 온 바울에게서 뇌물을 기대했던 펠릭스라는 인물이다. 노예였던 자가 속주의 위성도시 총독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당대의 자유로운 시스템을 대변한다.
사실 펠릭스가 기대했던 뇌물은 특별히 부도덕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자기도 그 시스템으로 올라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이상 다섯 가지 자유 중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무관한 것이 없지만, 그 중 특히 ‘자유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자유’는 리베르티노스(Λιβερτῖνος)라 할 것이다. 이 어휘에서 우리가 선호하는 자유주의자 또는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라는 말이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자)란 말은 자유주의가 고대로부터 출원하였던 상기 사례들과는 달리, 유래가 없는 개념이다.
사회를 뜻하는 socio는 친구라는 뜻의 라틴어 socius에서 비롯되었는데, 의미상 사회주의는 친구들 간의 공유 개념을 떠올려 마치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던 예수의 가르침을 기원으로 끌어들이려는 자들도 있지만, 예수의 가르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는 오히려 가난한 노동자의 300일 일당에 해당하는 값어치의 향수를 한순간에 뒤집어 써 소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그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한 제자가 이렇게 외친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이 자유한 자본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의 이름이 가룟 유다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결국 그가 후일 자기 선생을 팔아 넘겨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친구, 소시우스.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강령이요, 그들이 약탈하려고 찾아왔을 때 주로 쓰는 기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말을 Comrade로 고쳐 불렀다. 우리말로는 동무.
따라서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원리이다.
서울대 표어가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유주의자이면서 사회주의자인’ 자들이 출몰하는지, 앞서 소개한 ‘베리타스 보스 리베라빗(Veritas vos liberabit,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을 찬찬히 숙고해볼 것을 권해드린다.
진리가 빛이라면, 대체 어찌하여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 깃들 수 있는 것인지.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