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말레피센트> 2
이번 박욱주 박사님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안젤리나 졸리(말레피센트), 엘르 패닝(오로라), 미셸 파이퍼(잉그리스 왕비), 치웨텔 에지오포(코널), 샘 라일리(디아발) 등이 출연한 영화 <말레피센트 2> 속 사상에 대해 분석합니다. 요아킴 뢰닝 감독의 이 영화에서는 강력한 어둠의 지배자이자 무어스 숲의 수호자 ‘말레피센트’가 딸처럼 돌봐온 ‘오로라’와 ‘필립 왕자’의 결혼 약속으로 인간 세계의 ‘잉그리스 왕비’와 대립하게 되고, 이에 요정과 인간의 오랜 연합이 깨지며 숨겨진 요정 종족 다크페이의 리더 ‘코널’까지 등장하면서 두 세계가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편집자 주
디즈니와 말레피센트: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본 악당, 말레피센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에 속한 <말레피센트>(Maleficent) 시리즈는 저 유명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Sleeping Beauty)’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오늘날 이 동화는 1812년 그림 형제가 각색한 ‘가시장미(Dornröschen)’라는 제목의 판본과, 그림 형제가 각색한 줄거리를 충실하게 반영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덕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원작은 이미 1634년 이탈리아의 시인 바실레, 그리고 1697년 프랑스의 동화 작가 샤를 페로에 의해 출간된 바 있으며, 그 이전에도 14세기 경부터 기사문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긴 계보를 가진 까닭에, 이 설화들은 세계 고전설화 분류체계인 아르네-톰슨 분류제(Aarne–Thompson classification systems)에서 410번의 ‘잠자는 미녀’ 유형으로 묶여 분류된다.
영화 <말레피센트>는 이 중 그림 형제 판본에 등장하는 악역인 마녀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그녀에게 ‘말레피센트(안젤리나 졸리 분)’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고 원작과는 다르게 이 마녀를 순전한 질투와 악의 화신이 아니라 상처입은, 그렇지만 정감 넘치는 인물로 그려낸다.
그리하여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이 내린 저주를 말레피센트 스스로 힘겹게 풀어내게 되는 아이러니를 선보인다.
2014년에 개봉된 <말레피센트> 1편이 이처럼 그림 형제의 각색본을 기반으로 말레피센트를 새롭게 그려냈다면, 지난 주 개봉된 <말레피센트> 2편은 그림 형제의 것보다 오래된 페로 판본의 줄거리를 각색한 것이다.
이번에는 말레피센트가 아끼고 사랑하는 공주와 결혼하게 된 왕자의 어머니, 즉 왕비가 악역으로 등장한다.
<말레피센트> 시리즈를 통해 디즈니가 전달하려는 교훈은 직관적이면서 일관된 것이다. 디즈니는 전통적으로 악인으로 규정되어 왔던 마녀 말레피센트의 따뜻한 마음씨를 부각시킴으로써 중세의 마녀 사냥이, 그리고 그 현대적 재판인 이방인이나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인류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범죄 행위였다는 것을 강변한다.
이런 해석 방식은 최근 디즈니 본사와 디즈니 소속 프랜차이즈에서 제작되는 작품 전체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것이다.
소수민족, 유색인종, 난민, 동성애 및 성소수자, 여성, 어린이 등을 일괄적으로 차별과 억압에 고통받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강대국, 백인, 전범, 동성애 반대자(특히 기독교인), 남성, 성인 등에 의해 설계되고 고착된 지배 이데올로기로의 해체를 부르짖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이상은 오늘날 방송,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주류로 등극한 넷플릭스와 디즈니 등 거대 미디어 기업들을 특징짓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서구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바라보면, 이러한 현실 역시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 운동을 주도하는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차별적 질서 수립의 주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실은 ‘말레피센트’라는 말에 담긴 의미의 역사적 기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기독교와 말레피센트: 박해받는 기독교인들, 말레피쿠스(maleficus)
고대 그리스 제국과 로마 제국은 그 당시 세계 어느 지역과 비교해 봐도 뒤쳐지지 않는 최고 수준의 문화와 철학을 꽃피웠지만, 여전히 신화적인 종교에 지배되고 있는 전근대적 사회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새로 등장하는 위대한 사상이나 교설들이 기존 종교와 대결하고 대치되는 상황을 자주 맞이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반대파가 소크라테스에게 덮어씌운 혐의는 ‘아테오이(ἀθέοι)’, 즉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 신을 공경하지 않는 자’였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지만, 기존 그리스 신화가 가르치는 신들이 아닌 유일하고 참되고 선한 신에 대해 가르치다가 반대파들의 모함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라는 죄목은 이후 제정 로마 시대에도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를 번안한 로마 신화는 위대한 인물들이 죽은 이후에 신들의 반열에 선다고 가르쳤고, 로마 제국 지배층은 이 가르침을 정치적 권위를 보존하고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데 이용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황제 숭배 종교(Roman Imperial cult)였다.
영화 <벤허>(1959)에서 로마 호민관 메살라(스티븐 보이드 분)가 유대인 유력자 벤허(찰턴 헤스턴)를 정치적으로 포섭하기 위해 설득할 때 ‘황제는 신’이라고 말한 대사는 바로 이 황제 숭배 종교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로마 지배층은 ‘오직’ 로마 황제만을 신으로 모시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 산하에는 수많은 피지배 민족이 존재했고 그 피지배 민족의 수만큼이나 많은 신들, 종교들이 존재했다.
로마 지배층이 요구한 것은 각 민족의 신을 믿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황제 숭배 종교를 인정하고 제사에 참여해 로마 제국에 충성심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은 몇몇 종교 집단이 존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였다. 유대교의 경우 그 전통과 민족적 영향력 덕분에 상당한 양의 세금을 내는 것으로 황제 숭배 제사, 즉 ‘죽은 자들에게 드리는 제사’ 참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유대교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갖추지 못했던 그리스도교의 경우, 황제 숭배 종교와 그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여러 차례 궤멸적인 수준의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폭군 네로의 통치기(주후 64-68년)였는데, 당시 네로 정부가 기독교인들에게 씌운 혐의의 명칭은 ‘말레피쿠스(maleficus)’였다. 당시의 의미로는 ‘해로운 종교, 해로운 주술, 흑마법’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이 말은 로마 제국이 섬기는 신들을 존경하지 않는 행태를 지목한 것으로, 그리스 제국의 ‘아테오이’를 로마 제국 식으로 풀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말레피쿠스’란 로마의 황제 숭배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고 그 통합을 방해하는 ‘해로운’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 때문에 네로 이후 로마 제국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씌운 혐의 가운데는 ‘말레피쿠스’ 외에 라틴어 ‘아테오이(atheoi)’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된다.
즉 로마 제국 시대에 ‘말레피쿠스’라는 말이 지칭하는 이미지(신에게 저주받은 이들, 악의 화신, 흑마법을 일삼는 이들, 주술사와 마녀 등)는 원래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말레피센트>라는 영화 제목이 갖는 이 역사적 기원은 디즈니에 의해 고의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디즈니가 이 용어를 해석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말레피센트’라는 말이 지칭하는 이미지는 중세 및 근대 초기, 기독교가 마녀를 색출하고 사냥할 때 만들어낸 것이다.
이 말은 악독한 마녀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이렇게 마녀로 몰려 고문당하고 죽은 이들 대부분이 실은 선량하고 억울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 가톨릭 교회가 마녀 재판을 행할 때 씌운 혐의명 역시 로마 제국 당시 용어를 그대로 이어받은 ‘말레피쿠스’였다.
하지만 이 말을 디즈니처럼 순전히 정치와 결탁한 기독교의 범죄를 상기시키는 데만 활용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부당한 처사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한때는 이 말이 지칭하는 혐의 때문에 긴 고난의 시기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레피쿠스’라는 말에 결부된 부당한 박해와 마녀 재판, 그리고 살인의 역사의 본질은 기독교의 종교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 지배층의 학정과 공포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영화 <말레피센트>가 이런 통찰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말레피센트를 중세의 전형적인 마녀 형상으로 그려냄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에는 심각한 오해가 관여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