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칼럼
4. 랍비들과 아브라함
이방문화에 저항하는 입장과 그를 수용하는 입장은 유대교가 헬레니즘과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두 기본 방향이었다. 토라를 방패삼아 선민의식과 배타적 입장을 취한 것이 전자라면, 유대교의 합리성과 자연성을 내세워 세계종교로의 진입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것이 후자의 입장이다.
70년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면서 유대인 역사는 큰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유대교의 여러 갈래 중에서 바리새파만이 남아 위기 속의 유대교를 새롭게 일으킨 것이다. 그 이후의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바리새파 랍비들이 토라를 가르치는 종교적 활동을 핵심으로 삼았다. 토라를 중요시했던 랍비들의 활동은 토라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실제적 적용이라는 과제를 놓고 랍비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서 기록된 토라와 구전된 토라 개념이 생겼다. 기록된 토라는 모세오경을 말하고, 구전된 토라는 랍비들이 모세오경의 내용을 해석하고 적용시킨 법을 의미했다.
랍비들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랍비들이 남긴 자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랍비들의 구전법은 200년 경 '미쉬나'라는 경전으로 집대성되면서 그동안의 율법 해석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미쉬나'는 그동안의 율법 논쟁을 모두 63개 항목을 모아 6권의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미쉬나의 편집으로 토라의 율법 논쟁은 끝났지만 그 이후 '미쉬나'에 나오는 규정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한 논쟁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것이 '배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탈무드'이다. 미쉬나와 탈무드의 차이는, 전자가 전적으로 율법에 관한 내용(할라카)이라면, 후자는 율법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율법 이외의 다양한 내용(학가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가다'는 '알려주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로 율법 이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비유, 전설, 과학적 지식, 도덕적이고 영적인 교훈 등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랍비들의 아브라함 이해는 할라카가 아닌 학가다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일은 미쉬나나 탈무드가 하나의 통일된 의견을 중심으로 편집된 것이 아니라 랍비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모은 일종의 선집(anthology)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랍비 유대교에서는 일관성보다는 다양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내용은 탈무드 이외에도 랍비들의 성서주석인 '미드라쉬'에서 많이 나온다.
(1) 아브라함은 최초의 랍비이며 제사장
랍비들이 활동하기 하였던 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사상 중 하나는 토라의 선제성이다. 곧 토라는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그것이 창조와 더불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토라에서 배제시킬 수 없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아브라함이 다른 랍비들보다 율법에 덜 충실하다는 것은 결코 인정될 수 없었다. 랍비들이 묘사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뿐 아니라 후기 유대교의 절기들도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사제도를 비롯하여 정결법도 잘 알고 있었으며, 아침기도를 제정하여 시행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기록된 토라와 더불어 구전된 토라도 준수한 최초의 랍비이며 제사 일을 수행한 최고의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그가 행한 최초의 할례의식이 대속죄일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할례의식을 행하면서 흘린 그 때의 피를 보시고 매년 대속죄일마다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2)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
아브라함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그의 선제성 곧 아브라함은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랍비들의 주장으로 표현된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세계의 기원과 존재가 걸려있는 근거였다. 아브라함은 세대와 세대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로서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견고하게 이어진다. 모든 것의 시작과 존재 근거가 되는 아브라함은 자연히 마지막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지막 심판에서 아브라함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얻은 의와 공적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현재의 죄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도 구해 줄 수 있었다.
(3) 아브라함은 최초의 유일신관을 이방에 전한 인물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타파하고 참 하나님을 발견한 인물이었다. 창세기의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우상숭배자들과 투쟁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버지 데라와 더불어 동생 하란이 등장하며 또한 우르의 강력한 통치자였던 니므롯(Nimrod)도 역할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우상타파자로서의 모습은 이슬람의 코란경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올바른 하나님 지식을 전해 주었다. 우선 사라를 비롯한 자기 가족들을 유대교로 개종시켰으며 다른 이방인들도 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유일신을 믿은 첫 인물이면서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킨 최초의 유대교 전파자였음을 보여준다.
랍비들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이방문화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두 방향의 노력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이 복을 얻게 되어 있지만 우선순위는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이외에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 사후 그두라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오직 이삭을 통해서만 이어졌다. 이삭 이외의 자식들은 모두가 육체의 자식일 뿐 약속의 자식이 아니었다.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 이외의 아들들에게는 공식적인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만이 아브라함의 정통 자식이라는 유대교의 배타적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문을 열어놓았다. 아브라함 자신도 처음에는 율법에 충실한 경건한 유대인이 아니라 다만 참 하나님을 찾는 이방인 구도자였다. 그러한 점은 랍비들이 끊임없이 직면했던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개종을 원하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과제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