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시인
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가 서거한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시인 윤동주는 우리에게 참 아름다운 시어를 남겼다. 육신은 비록 처참하게 산화되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 덕분에 그는 어려웠던 시대를 별빛처럼 반짝이며 산 시인으로 추억하게 된다.
그는 1945년 2월 16일, 두 권의 자필 시집을 남기고 떠났다. 1947년 2월 추도회가 거행되고 유작이 처음 소개됐다. 1948년 1월 그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분신 같은 육필 원고를 후배 정병욱과 이양하 교수에게 보관케 함으로써, 첫 시집이 나온 이후 꾸준히 그의 작품들이 발굴돼 지금까지 130편의 옥고가 우리에게 전해지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으로 기독교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곳, 북간도! 김약연 목사를 비롯해 아리랑의 춘사 나윤규, 조두남, 송몽규, 문익환, 이동휘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손에 쥔 채 시대적 소명을 받고 북간도로 떠났다.
그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했는지, 그들의 희생과 눈물과 기도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윤동주 시인은 연변 용정에서 출생해 명동학교에서 수학했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문익환이 진학했기 때문이다.
당시 숭실중학교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평양에 자리잡고 있던 학교로, 1897년 배위량(裵緯良, William M. Baird) 선교사의 자택에서 13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다.
윤동주는 숭실중학교 시절 문학에 심취해 1935년 10월에 발간된『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공상(空想)’을 발표한다. 이 시는 최초로 활자화된 윤동주 시로 주목하게 된다. 윤동주가 쓴 최초의 동시로 ‘조개껍질-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와 ‘오줌싸개 지도’ 등도 이때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1936년 3월까지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등 무려 15편의 시를 썼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를 열어간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와서 그가 부딪힌 것은 뜻밖에도 ‘신사참배’ 강요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회유와 탄압, 말살이라는 정책의 일환으로,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심지어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는 황국신민화를 추진했다.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던 기독교는 조선총독부가 강경책을 펴자, 신사참배 정책에 저항하면서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숭실중학교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숭실학교는 무기휴교에 들어가고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이렇게 단 7개월만에 끝난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한다. 광명학원은 숭실중학교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대륙낭인 출신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가 된 것이다.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카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38년 4월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조선일보에 그 해 10월 시 ‘아우의 인상’, 이듬해인 1939년 2월 수필 ‘달을 쏘다’를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윤동주의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문우(文友)’ 발표 작품이다. ‘문우(文友)’는 1932년 12월 18일 연희전문학교 문과 문우회에 의해 태어났다. ‘문우’는 1941년 5호를 마지막으로 종간하는데, 당시 송몽규가 문예부장으로 활동했다.
시대의 압박으로 마지막 발간된 ‘문우’에서 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를,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편집 겸 발행인은 후일 일본 유학을 하게 되는 강처중(姜処重)으로 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문과 4학년 동급생으로, 절친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리고 이는 최소한 1941년 6월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티며 작품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학을 사랑했던 그들이였기에, 숱한 고생 속에 겨우 모았던 원고 대부분이 검열에 걸려서 게재 불가능이 됐다. 식민지 공간 속에서 총력전의 군국주의 체제 강화로 인해, 교우회 발행 ‘문우’는 해산되고 말았다.
마지막호 전체 내용이 거의 대부분 일문(日文)으로 쓰여져 있을 정도였지만, 윤동주 시만은 끝까지 한글 작품으로 남아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밤하늘에 별빛같은 삶을 산 시인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