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마테오 리치 선교사에서 다산 정약용까지
한문 성경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조선 후기이다.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이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이다.
그는 중국어를 배워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지도까지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여 유교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유학자들의 한계를 찾아내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하므로 기독교는 ‘서교(西敎)’,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로 『성호사설』을 저술한 이익(李瀷)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라며,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천주교) 즉 서학이 유교와 불교 사상이 굳건한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인조 때이다. 숙종 때에는 교세를 자못 떨쳤으며, 영·정조 때에는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처에 성행했다.
특히 영조 시대에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익(李瀷)을 중심한 서학 연구는 그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 서학’이란 학문체계가 수립됐고, 조선 후기 실학 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 불안 속에서 서학 사상은 지식층에게 새로운 개혁의식의 확대와 봉건사회에 대한 개혁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서학이 크게 번창하게 되자, ‘서학서(西學書)’의 반입을 금지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구 문물을 배운 실학파 학자들이 기독교를 공부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사상(西學)은 조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조선 봉건사회의 개혁을 이끌려는 실학파가 생겨났고, 그 대표적 실학자 이익의 사상적 후계자가 바로 ‘정약용’이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1784년 실학파 선구자인 이승훈은 사절로 북경에 갔다가 귀국 직전 예수회 신부 그라몽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명동에 있는 김범우 집에 조선 성당을 건립하고 그의 동지 이벽, 권철신. 권일신 형제와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이가환 등과 공동으로 기독교를 포교했다.
당대 유학자들이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은 성리학으로 표현되는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해답이 성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16세 때 이가환 및 매형이 되는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서학에 심취했다. 정약용의 개혁 사상과 과학적 지식은 이때 습득한 서학, 즉 기독교 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고, 1785년 기독교에 입교하며 ‘요한’이란 세례명을 갖게 된다.
기독교 포교활동이 표면화되면서 조정으로부터 금지령이 내려졌고, 기독교 탄압 시책들이 나오게 된 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1801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기독교(서교(西敎)를 사교(邪敎)라며 엄금·근절하라는 금령을 내렸다.
기독교인으로 밝혀진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이가환,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개혁가 등 100여명이 처형되고, 400여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수배되어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교회를 구하기 위해 흰 명주에다 교회의 박해 상황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황사영이 편지를 쓴다.
당시 베이징(北京) 주교 구베아에게 서한을 작성하여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것이 발각돼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고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으로 신자가 된 이로, 다산 선생의 조카사위였다.
다산 선생의 형제들은 신앙의 순교자가 되었다. 정약종은 처형당했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당했다.
유배에서 풀릴 때까지 18년간 정약용은 학문에만 몰두했다. 이 때 정치기구의 전면적인 개혁과 지방행정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 폐지 등을 주장했다.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개혁의지는 식을 줄 몰랐고, 그의 개혁사상 속에는 기독교 사상이 분출됐다.
1836년 정약용의 사망 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풍양 조씨 조만영 주도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탕 신부 그리고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 등 70여명의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학문에는 철저히 기독교 신앙이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선생은 『시경(詩經)』을 통해 분명히 창조주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것이 ‘천(天)’, 즉 상제(上帝)이며 상제는 인간만사를 강림하는 능력을 가진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자라고 보았다.
만물의 근원인 ‘천’, 즉 상제는 결코 주자의 리(理)와 같은 자연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위격(位格)’을 갖춘 윤리적이며 신적인 존재였다. 우리를 굽어보고 재앙과 행복을 가려주는 이러한 천, 상제를 성심으로 경외하여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의 이러한 사상은 국가 개혁에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고, 이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에 잘 드러나 있다. 목민심서에서 ‘애민’은 기독교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때, 『마과회통(麻科會通)』으로 백성과 고통을 나눈 다산 정약용의 참 모습을 우리 공무원들이 되새겼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약용의 가장 큰 업적은 백성을 위해 살아가는 ‘애민’ 정신으로, 다산 선생이 후대에 존경받는 이유이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 남양주시가 다산 정신을 계승하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다산 선생에게서 성경의 총리 다니엘이나 숨겨진 신앙인 니고데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산은 올곧은 신앙적 가치관과 정신 세계로 부패한 관료들의 핍박과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다니엘처럼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신의 신앙대로 백성을 섬기는 일을 다 했다.
“악당들의 유언비어가 더욱 심해졌다”고 ‘자찬묘비명’에서 표현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18년의 세월을 원망이나 좌절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방대한 저술활동을 통해 척박한 유배지를 학문의 성지로 승화시킨 그 정신과 혜안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남긴 저서의 내용과 양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500여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의 시(詩)와 글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자신의 절망적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슬퍼하고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인으로써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다산 선생의 자손인 정영진 관장이나 크로스로드를 이끄는 정성진 이사장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며,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 보자. 지금 한국 사회는 다산 선생이 살던 조선 봉건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들의 당파 싸움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상실, 관리들의 부정부패 만연,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사회현상, 부동산과 토지문제, 중소업체의 몰락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은 그 때와 같다.
형제를 죽이고, 매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인 그 시대를 정약용 형제는 저주하지 않았다. 시대를 저주하는 대신 아파했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Those who mourn)’는 불의한 시대에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이들과 대면해야 한다.
이효상 원장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