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이라 여기던 기존교회 무너뜨리는 게 사명이었다”
10여 년 전 기독교계에 침투했다가 발각된 신천지 언론 ‘기독교초교파신문’(이하 초교파신문)의 전 광고국장이 신천지의 실태를 고발했다.
초교파신문 설립 멤버로서 편집부국장과 사업부국장 및 광고국장 등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진 심효진 씨(본명 심해정)는, 최근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자신이 이 매체에서 6년간 일하며 겪었던 고통과 신천지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털어놓았다.
심 씨는 2008년 직접 기자회견에도 나서, 신천지 최고 간부인 12지파장과 7교육장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운영되던 신문의 존재를 폭로했다. 그는 현재 전주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며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심 씨는 2001년 그림동호회로 위장해 접근한 신천지에 의해 공부방과 신학원(센터)을 거쳐 신문기자로 발탁된 과정, 그리고 가족과 심지어 다른 신천지 교인들과도 단절된 비밀조직 형태로 운영됐던 초교파신문의 실체를 이야기했다.
또 그 과정에서 각 지파에서 발탁된 30여명의 직원들이 서로 ‘하늘 문화’에 쌓을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으며, 교계 언론사에 신분을 속인 채 신입 기자로 침투했고, ‘바벨론’이라 생각한 기존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을 가장 큰 숙제로 여겼다는 일화들을 전했다.
끼니를 제때 해결할 수 없는 피폐한 상황의 연속에서 일을 그만두고 가출 6년여 만에 집으로 내려갔다가, 가족에게 이끌려 이단상담소를 통해 신천지를 탈퇴한 과정도 설명했다.
각 지파에서 한두명씩 30여명 발탁해 설립
신천지 최고 간부도 모르게 실미도식 교육
서로 과거 묻지도 않아… 철저한 비밀조직
심 씨는 “밥 로스라는 화가를 워낙 좋아해 한 전시회에 갔는데, 예쁘고 친절한 분이 다가와 재료비만 받고 (미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신천지가 2000년도에 들어서며 확장되던 시기, 각종 동호회나 대학을 기반으로 한 문화 활동으로 (포교를) 노력했던 시점”이라고 했다.
심 씨는 “3개월 정도는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저에 대해 관찰하던 시기였다”며 “이후 공부방에서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구약과 신약을 오가며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너무 대단해 보여 말씀의 근원지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신학원으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심 씨는 “당시 100명 정도가 앉아 있는데 나같이 성경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극적인 마음에 앞자리에 앉아 공부했다. 일명 모범생이었다”며 “비유풀이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7개월을 공부했다”고 말했다.
심 씨가 신천지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과 다툼이 있을 때쯤, 이만희 교주로부터 신천지에 지령이 내려왔다. ‘하늘 문화’를 섭렵하기 위해 문화 사역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각 지파마다 우수한 사람을 한두명씩 뽑았고, 소위 ‘열성분자’라고 저를 주목해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각 지파에서 약 30명이 올라와 같이 숙소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받은 교육들은 ‘실미도’ 교육이었던 것 같다. 친구와 부모와 단절하고, 지파의 관계된 사람들과도 단절해 오로지 혼자였다. 발탁된 사람들끼리도 서로 ‘당신은 무슨 일을 했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완전히 비밀조직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심 씨는 “일에 대한 것도 서로 공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어보면 ‘왜 물어보나. 내가 하늘 문화에 더 상금을 쌓을까 봐, 내 것을 빼앗아 가려는 거야?’ 하는 뉘앙스였다. 서로에게 비밀로 하고 각자의 일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에게 내려오는 가장 큰 숙제는 ‘언론사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이 떨어지기 전부터 우리는 기존 교회를 바벨론이라 생각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숙제였다”고 말했다.
심 씨에 의하면 광주 베드로지파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큰 효과를 거둔 것이, 교회나 단체를 통째로 옮기는 ‘산 옮기기’ 전략이었다. 신학원, NGO, 각종 선교단체, 대학교에 전략적인 침투가 이어졌다.
‘기본급만 받겠다’는 식으로 기독교 언론사에 침투
먹을 게 없어 힘들어도 독립투사처럼 의지 불태워
‘하늘 문화’ 상금 위해 서로 시기질투, 왕따도 생겨
피폐한 몸과 마음, ‘내 안에 예수가 없구나’ 깨달아
심 씨는 “불편한 이야기이지만 언론을 먼저 접수해야 하늘 문화가 접수된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사에 들어가는 숙제를 안고, 어떻게든 들어가서 밑에서부터 어떻게 기사를 쓰는지부터 배우라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심 씨가 초교파신문의 실체를 폭로하기 전부터, 기독교계에는 신천지 신도들이 신분을 위장하고 입사했다가 탈퇴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이 발생했었다.
심 씨는 “기본급만 받겠다거나 무료로 봉사하겠다는 식으로 침투해 언론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익히고, 3개월 혹은 6개월 정도 되면 퇴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컴퓨터, 전화기 등 장비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 모아 용산 삼각지에 사무실을 얻었다고.
심 씨는 “먹을 게 없어서 많이 힘들어도 33명의 독립투사처럼 매일 아침 의지를 불태웠다”며 “‘하늘 문화’를 어떻게 널리 알릴지, ‘바벨론’을 어떻게 무너뜨릴지 고민하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나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힘든 것을 버텼다”고 했다.
서울에 본부가 자리잡히자, 5대 광역시에 지사를 만들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광고국장이던 심 씨는 “대형교회들을 찾아가 ‘문화사역에 관심을 가져 달라. 광고를 3개월간 무료로 실어 주겠다. 지금은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며 헌금을 요청하기도 했다. 신문을 찍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200여개의 교회에 돌렸다”고 말했다.
심 씨는 “이런 생활이 3년째 되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신문사 안에서 누가 일을 잘한다거나 기사를 잘 쓰거나 광고를 따면 서로 시기질투했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들며)’ 점점 사랑이 없어졌다. 자신의 상금은 없어지고 타인이 상금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니 미웠다. 일명 왕따도 생겼다. 그 사람은 안 도와 주려 하는 일도 생겼다”고 말했다.
심 씨는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까맸다. 내 마음 안에 예수님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예수의 피가 떠올라야 하는데,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고 느껴졌다. 신천지는 보혈 찬송을 부르지 않는데, (그 날은) 보혈 찬송을 부르며 나도 모르게 울었다. 예수님을 이만희 씨로 알고 살았는데, 예수의 영이 들어왔던 것”이라고 했다.
심 씨는 “그때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하는 일마다 더 몸이 힘들어졌다. 결국 편집국장에게 사명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고 했다. 심 씨가 말한 당시 편집국장은, 역시 신천지 신문으로 알려진 천지일보의 대표이사라고 덧붙였다.
가출 6년여 만에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심 씨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서 와라’ 하시고는 너무 행복해하시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셨다. 눈물이 핑핑 돌았다. 만약 (어머니가) ‘그동안 어디에 있었느냐’고 하셨으면 바로 나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지혜로우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심 씨는 “혼자 이만희가 썼다는 계시록 책을 펼쳐보는데, 앞뒤 말이 맞지 않았다. 분명히 읽혀야 하는데 읽히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심 씨는 가족들과 크고 작은 충돌 끝에 이단상담소를 통해 신천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심 씨는 이후 “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신문사에서 나를 찾아왔다. 나를 걱정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의 비리가 나갈까봐 그랬던 것”이라며 “동고동락한 것을 생각해서 그냥 잘 가라고 하고 보냈다”고 했다.
그는 “그날 밤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왜 언니만 가느냐’, ‘불쌍한 나는 안 데려가냐’, ‘언니만 살면 되냐’고 했다. 한 달 동안 꿈에 눌렸다. 그 친구들이 늪에 빠져가는데 제가 구할 방법이 없었다. 너무 불쌍하고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심 씨는 “한국교회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친구들이 악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며 “마음이 황폐한데 말씀을 봐도 해갈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채우지 않으면 이단 세력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