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속에 피어나는 찬양의 꽃 42]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시편 42편 강해
요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부터는 다윗의 시가 끝나고 고라자손의 시가 시작됩니다. 고라는 반역자입니다. 그러나 그 자손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라의 자손의 시는 은혜롭습니다. 고라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들 조상의 죄를 반복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낙망합니다. 그의 불안은 반역자의 자손으로 태어나 겪고 있는 내재적인 불안이었습니다.
거기에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는 백성들의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인을 도우시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도우십니다.
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는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1-2절)”.
시인은 불안하고 낙심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은 여가, 놀이, 즐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슴에게 시냇물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사슴에게 시냇물은 곧 생명입니다.
‘갈급하다’는 것은 ‘부르짖다. 헐떡거리며 달린다(pant)’는 의미입니다. 중동과 같은 초원지대에서 건기가 되면, 사슴은 물을 찾아 먼 거리를 헐떡거리며 여행합니다.
그 길목에는 맹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슴은 시냇물을 찾기에 얼마나 갈급한지, 맹수들에게 잡혀 먹힐 위험도 무릅씁니다. 생존할 유일한 방법이 물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그 정도로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위기감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건기에 ‘타는 목마름으로’ 시냇물을 찾는 사슴과 같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는 불안하고 낙심하는 가운데 빨리 나가서 하나님을 뵙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을 때 돈에 목마르고 정욕에 목마르고 지식에 목마르고 명예에 목마릅니다. 때로는 민주주의에 목마르고 시대의 문화에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목마르고 예수님께 목이 마르고 성령님께 목이 말랐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알기 원하고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필사적으로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의 낙심과 불안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2.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3-4절)”.
시인이 왜 그렇게 낙심하고 절망했는지를 말씀합니다. 시인은 전에 성일(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며,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찬양을 드렸습니다.
유월절과 초막절과 수장절의 명절을 맞이하면 행렬에 앞장 서 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일 시인에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시인은 기쁨과 감사가 가득했던 과거를 기억하면 더욱 마음이 상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시인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다. 스스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인의 고난을 보면서 멸시와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은 네가 하니님을 믿으면 어떻게 이런 문제도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합니다. 다윗도 이런 말을 들으며 눈물이 음식이 될 정도로 많이 흘렸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갈망하였습니다.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그에게 임재하여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목마른 사슴과 같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면 그의 문제는 해결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시인을 보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이방인의 채찍을 맞고 있습니다.
시인을 보며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떡을 주었습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내려와서 우리로 보고 믿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네가 왜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합니다.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불안하고 낙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왜 나를 버리시냐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5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어느 정도 그들의 말에 공감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낙심하고 불안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나님이 현실 속에 나타나지 않음으로 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책망합니다.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나타나 도우심으로 그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살아계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낙심하나 하나님을 보면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4. 내가 주를 기억하나이다
6-8절을 보면 시인은 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영혼이 낙심되므로, 요단 땅과 헤르몬의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합니다.
미살 산은 헤르몬 산의 한 봉우리입니다. 하나님은 헤르몬 산과 미샬 산에서 요단강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 강물은 갈릴리 바다로 흘러갑니다.
주님이 폭포 소리같이 크게 소리치자, 깊은 갈릴리 바다가 서로 부르며 파도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다의 파도가 멈추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일으키시는 모든 파도와 물결이 시인의 마음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을 움직이시고 바다의 파도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다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시인의 마음에 임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시고 우리의 심장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낮에 그 인자하심을 시인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시인은 밤에는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그는 밤에 생명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합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속에 임하고 있습니다.
5.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9-10절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반석으로 믿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탄식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잊으심을 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녔습니다. 원수들은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시인은 칼이 뼈를 찌르듯이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6.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11절을 보면 원수들은 다시 반복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시인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고통하였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하였습니다. 아까 가졌던 불안과 낙심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말합니다. 너는 낙심하며 불안해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는 다시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심으로 그는 여전히 찬송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는 불안하고 낙망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도, 현실에서는 다시 고통이 밀려옵니다. 죽을 때까지 밀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우리는 고통을 극복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내재적으로 있는 불안과 낙심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환경이 주는 불안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절망의 파도를 넉넉히 이기게 도우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오요한 목사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