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문화 마르크스주의: 비판적 성찰(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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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유래, 발전과정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 1910년대 신마르크스주의 발생

1. 1910년대 공산주의 혁명 소련 너머 확산 실패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196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10년대 시작된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블라드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이끄는 다수당인 볼세비키(Bolsheviki)가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하고 볼세비키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공산당 혁명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레닌이 이끈 사회주의 혁명이 소련연방 너머로 확산은 실패하였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와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 1885-1971) 같은 좌파지식인인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에 이미 시작된다. 정통 마르크스이론은 1차 세계대전에서 노동자 계급이 전 유럽에 걸쳐서 봉기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를 세울 것을 예언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에 따라서 정의했으며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하여 우둔화되고 체제에 순응되도록 유혹받는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무산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궐기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뒤엎고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4년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역사적 격변기에 노동자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1917년에 마지막으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다른 유럽국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예언은 빗나간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두 마르크스이론가들, 이탈리아의 그람시와 헝가리의 루카치는 각기 독립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결론이란 서구문화와 기독교가 노동 계급을 눈멀게 했다는 것이다. 서구의 전통적 문화와 기독교 가치가 노동 계급을 세뇌(洗腦)시키고 눈 멀게 하여 자본자들의 착취와 수탈에 저항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요구를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 문화와 그 기초인 기독교가 무너지기 전까지 공산주의는 서구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해결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학교, 정부, 관청, 미디어 등 “기관들을 통한 긴 행진”(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적 가치가 사회의 위 계층으로부터 아래 계층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게오르그 루카치: 서구적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루카치(Georg Lukacs)는 지식인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그람시(Antonio Gramsci),는 지식인 헤게모니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 신마르크스주의다.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들의 폭력혁명을 통하여 마르크스적 이상사회를 이룬다는 주장에 대하여 신마르크주의는 이를 수정하여 좌파 지식인들이 사회의 모든 기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문화를 통한 혁명의 긴 행진을 주장하기 때문에 문화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서구적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루카치는 히틀러 편에 선 독일 헌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학자로서 스탈린의 편에 선 혁명적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18년의 독일 혁명 직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하고, 1919년의 헝가리 혁명에 참가하여 혁명정부의 문화부 차관이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자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하여, 『역사와 계급의식』(1923), 『레닌』(1924)을 써서 혁명이 좌절한 원인과 마르크스주의의 주체성 문제를 추구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치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로 삶의 양식과 세계관을 통째로 바꾼 뒤 본격적으로 매진한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정치적 실천 경험이 바탕에 놓인 그의 책 『역사와 계급의식』 덕분에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1919년 헝가리의 단명(短命)했던 볼세비키 혁명의 벨라 근 정부(Bolshevik Bela Kun government)의 문화부 차관이 되었을 때 루카치의 첫 정책 시행 중 하나가 섹스 교육(sex education)을 헝가리의 공립학교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루카치는 헝가리 문화부 차관에 취임하면서 부모와 가정, 가족애라는 전통적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진적 성교육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를 사회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성적 쾌락을 지향하는 성교육을 시행하였다. 루카치는 서구의 전통적 성 모랄이 파괴된다면 서구문명 자체 파멸을 향한 거대한 계단을 디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2. 1923년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사회연구소 창립
독일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23년 부분적으로 루카치에 의해서 영감받아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사회연구소라 불리우는 싱크 탱크(a think tank)를 만들었다. 이러한 루카치의 1924년 문화교육으로 사회 전반에 마르크스주의를 침투시키자는 기획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의 연구소로 이어졌다. 이 연구소는 곧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알려졌고 문화 마르크스주의 창립자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자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아도르노(Theodor Adorno), 프롬(Eric Fromm), 마르쿠제(Herbert Marcuse) 등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용어에서 문화적 용어로 번역했으며 마르크스의 착상을 문화적 영역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경제 분야에만 집중한 비판적 분석을 문화 전반으로 확대했으며, 마르크스가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물질의 이차적 반영으로 본 것을 수정하여 문화와 이데올로기라 독자적인 영역으로 사회혁명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밝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문화는 마르크스가 보듯이 사회의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아주 중요한 변하는 부분이라고 보았다. 문화는 마르크스에게 물질 관계에 종속되고 물질관계의 반영(反映)인 사회의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실제로 사회적 분할(real societal division)이란 계급 분할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의 경제 비판은 실증주의자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단순하고 대충의 경제적 분석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마르크스의 초기 추종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데 문화적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아니하였다.

3. 안토니오 그람시: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 마련
그러나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로부터 임금을 받는 노동계급은 마르크스 혁명을 이끌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중산층인 증오받는 부르주아(the hated bourgeoisie)에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예속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그람시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 지배계급이 경제적 생산수단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식과 언론을 통제하면서 구성원들인 노동계급의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수정을 가하고 지식인의 헤게모니를 역설했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인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를 독자적 자율성을 갖는 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 문제를 다루어 상부구조론인 사회·정치 이론을 정립하여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람시는 상부구조론을 통하여 마르크스 유물론적 해석의 특징인 물질 환원주의, 문화 반영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상부구조인 관념보다는 하부구조인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의 관념론적 현실 파악을 유물론적으로 전도(顚倒)시켰다. 그람시는 이를 수정하여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정신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정신적인 것은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마르크스주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한 것이긴 하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상부구조론은 마르크스의 하부구조 편향적 유물론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폭력혁명적 투쟁도 중요하지만 이데올로기 투쟁은 더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다. 그람시의 사회주의 혁명론에서 헤게모니론은 중요하다. 헤게모니란 한 국가가 가지는 힘, 패권 등을 의미하며, 현대에는 강대국이 전 세계에 지배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는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계급 간의 관계, 특히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의미로서 헤게모니를 설명하였다. 비판적 의식으로 무장된 지식인이 지배 헤게모니에 대결하는 대항 헤게모니를 창출하여 이것을 통한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투쟁이 진보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효과적인 혁명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람시는 지식인과 대중, 전문가와 비전문가, 엘리트와 일반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구분을 파기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역사의 변혁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고하고 창조하는 존재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서구 혁명의 이론가, 혹은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알려졌다.

II. 1950년대-1960년대 문화 마르크스주의: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1. 프랑크푸르트 학파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서구 전통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을 통하여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자비하게 끈질지게 모든 전통과 권위를 비판하면서 이를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이 학파는 “편견에 대한 연구 시리즈”(a series of “studies in prejudice)를 썼다. 이 시리즈는 전통적 서구 문화를 신뢰하는 자는 누구나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sexist), 파시스트가 되고 정신병 앓고 있는 자로 간주하였다. 이들의 전공은 마르크스처럼 경제학이 아니라 문학, 철학, 예술, 사회학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서 인간 욕망 억압의 심리학적으로 조건지움을 발견하면서 마르크스를 프로이드와 연결시켰다.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를 선전하기 위하여 철학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동성애자로서 살고 있는 미국인 가정의 모습에 대한 텔레비전 쇼를 잇달아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핵심 인물들은 2차대전시 미국 서부 홀리우드에서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2. 막스 호르크하이머: 전통 사회에 대한 부정이론으로서 비판이론 제시

1) 기존 체제 혁명하는 비판이론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는 그의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에서 사회비판이론의 강령을 선언적으로 알린다. 전통이론은 체제 옹호적이며 기존사회의 재생산 기능을 수행한다. 전통이론은 이론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스스로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 체제에 활용되며 보수주의, 정숙(靜肅)주의와 타협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판이론의 이념은 산업사회에서 노예적 상태로부터 노동자들의 해방이다. 해방된 사회를 위해서 초기의 비판이론은 사회적 혁명을 추구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자본주의 강력한 흡입력에 따라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사회혁명에 대한 기대는 곧 포기한다. 그럼에도 기존 사회의 비판과 변화의 추구는 비판이론의 영구적 과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에는 마르크스 레닌이 제창한 사회주의적 폭력혁명은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무산됨으로 실패함으로써 점차 사라지지만, 그 혁명적 정신과 사유는 유지되었다. 비판이론이 취하는 태도는 긍정적이지 않고, 낙관적이지 않고, 생산적이지 않으며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파괴적이다. 생산적이지 않다는 말은 비판이론이 사회변혁에 대한 전략과 사회비판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르크하이머는 진정한 이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비판이론은 비관주의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적 발전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부정성들을 비판하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이기에, 비판이론에 내재하는 이론적 비관주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비판이론은 전통이론이 가진 긍정적인 면을 부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체제와 전통 파괴적이란 비판을 들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비판은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는 실재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비판적 성찰이 가능한 조건을 찾는다. 이렇게 호르크하이머는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 성찰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실재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은 실재에 대한 전체적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실재에 대한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는 인간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2) 이성주의적 환상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특징지우는 역사와 역사와 현실에 대한 본질적인 부정주의(Negativismus)와 비관주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인한 것이다. 비판이론은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부터 탄생했다. 비판이론이 갖는 강한 부정성은 유토피아적 현실부정으로 인한 것이다. 비판이론은 어떤 실증주의적 시도, 과학주의적 시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맞선다. 비판이론은 근대 자연과학과 더불어 소실되어 버린 유토피아적 기획을 소생하고자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기획은 헤겔과 마르크스가 시도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체주의적 파악이라는 이성주의적 환상(幻想)에 입각한 것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그리고 마르쿠제는 모두 문화 마르크스주의 정신에 입각한 사회주의 유토피아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구호적으로는 그럴듯한 계급 없는 이상사회를 외쳤으나 구체적인 실현 방법은 비윤리적이고, 가식과 협잡과 거짓으로 얼룩진 것이다.

3) 전체주의적 망령: 칼 포퍼의 비판
이미 오스트리아의 비판적 합리주의자(critical rationalist) 칼 포퍼(Karl Popper, 1902- 1994)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한 역사에 대한 총체적 파악을 전체주의적 망령에 의한 열린 사회의 적으로 보았다. 칼 포퍼는 10대 후반에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등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공산주의자들이 이 사건을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실망하게 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보고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결별하게 된다. 그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자신의 사상 편력을 정당화한다.

역사를 자유의식의 자기 진보로 본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 파악을 뒤집어서 역사를 생산력의 발전과정으로 본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 파악은 역사 현실에 맞지 않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열린 사회의 적들이 되어 1930년대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독일에서는 나치주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으로 나타나 국민들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과 대량 학살로 인간의 기본권과 자유를 말살하고 전쟁으로 문화를 황폐화시키고 역사를 후퇴시켰다.

3. 허버트 마르쿠제: 미국 신좌파의 대부
1933년 히틀러가 이끈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숙명적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자들은 미국으로 도피했고, 뉴욕시에서 다시 세워졌다. 허버트 마르쿠제도 1935년 미국으로 피난하여 뉴욕 콜럼비아 대학에 자리잡았다. 나치 정권이 무너지자 2차세계대전 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학자들 대부분이 독일로 되돌아 갔으나 마르쿠제는 미국에 머물렀다. 거기서 마르쿠제는 그 기획의 촛점을 독일에서 전통적 서구 문화(traditional Western culture)를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미국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옮겼다. 마르쿠제는 ‘신좌파의 대부’(father of the New Left)라는 별명을 얻는다. 1950년대 마르쿠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는 주체는 흑인, 학생, 페미니스트 여성 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연합(a coalition of blacks, students, feminist women and homosexuals.)이라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학자들의 아주 추상적 작품들을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썼다. 그의 책 『에로스와 문명』(Eros and Civilization)에서 그는 성을 억제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쾌락 원리(the pleasure principle)를 실재 원리(the reality principle)로 고양시키고, 일 없는 오로지 놀이만의 사회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이 아니라 섹스를 하라”(Make love, not war)고 반전(反戰) 에로스 사상을 외쳤다.

마르쿠제는 “해방의 관용”(“liberating tolerance)을 역설했다. 그가 말하는 관용이란 좌파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에 대한 관용(tolerance), 우파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에 대한 불관용(intolerance)이었다. 1960년대 마르쿠제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서 음탕(licentiousness)과 사회적 무책임(social irresponsibility), 세대 간에 그리고 가족과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권위 부정(rejection of the authority) 등 퇴폐적이고 좀먹는 관념들(corrosive concepts)을 좌파 학생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신좌파(the New Left)의 족장 구루(chief “guru”)가 되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 마르크스주의를 미국의 베이붐 시대에 주입했다. 마르쿠제의 영향 아래 일어난 유럽 68학생 운동권은 3 M(Marx, Mao, Marcuse: 마르크스, 마오, 마르쿠제)를 영웅시하면서 다른 3K (Kinder, Küche, Kirche : 자녀, 부엌, 교회)를 전복하고자 했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이론적으로 제시한 문화 마르크스주의를 가시적으로 현실화 하였다.

4. 다문화주의와 정치적 올바름: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시대적으로 다가오는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전통적 서구가치와 기독교 전통을 파괴하는데 이용한다. 오늘날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세속주의와 결합하면서 루카치와 그람시가 1919년 제시한 목표 설정, 즉 “서구 전통 문화와 그것의 기반으로서 기독교의 파괴”를 실행하고 있다. 이 목표를 향한 큰 걸음이 68문화혁명으로 내디뎌진 것이다. 오늘날 평범한 현대인들이 양식적으로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은 편견이나 편향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양식(良識)으로서 문화 마르크주의의 목표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전통 기독교 가치를 부정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세뇌공작으로서 문화 마르크스주의에 편입하는 것이다. 문화 마르크스주의가 친 커턴 배후에는 기독교 전통과 가치를 파괴하려는 칼 마르크스의 혼령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속)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칼럼 게재 문의 7twi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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