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책 읽기의 즐거움 속으로
코로나 시대, 다들 궁금한지 뭐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 비대면과 차단의 시대를 극복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책 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져 사는 것이다.
좋은 책을 접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더 이상 ‘독백’이 아닌 상호소통이 되고, 거꾸로 좋은 관계에 익숙해진 이들은 바람직한 ‘독서’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매일 신문과 성경을 정독하고 책 한 권 정도를 읽으려 한다. 이미 벌어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알려 주는 것이 신문(新聞)이라면, 성경은 과거에 쓰여진 책이지만 사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우리가 시간을 쓰는 방법에 따라 금도 되고 은도 되는 것처럼, 하루의 생활을 신문과 성경으로 거룩한 독서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인지의 문제는 본인의 선택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 신문을, 한 손에 성경’이라고 말했던가. 신문은 현 시대의 삶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이 현 시대의 인간 사회의 모습이다.
이 신문과 책을 통해 인간사의 사고방식, 인간의 고통, 사유방식, 문제의식을 캐치(catch)하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을 통해 찾아보려 한다.
독서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특히 유아와 청소년의 독서는 그들에게 많은 지적 소산을 안겨줌과 동시에, 다양한 창조력을 키우고 풍요로운 감성을 보살펴 준다. 하지만 현실은 스마트폰이나 방송 미디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독서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이라면, TV 앞에서는 2시간 이상이라고 한다.
스마트폰 없이 살아가기 힘든 세대를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라고 하는데, 혹시 우리가 이미 스마트폰에 중독된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는 아닐까. 인문, 사회, 자연, 과학 등 다양한 융합을 통해 시대를 읽는 혜안이 가지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책읽기’이다.
“오직 독서, 이 한 가지가 큰 학자의 길을 좇게 하고,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다움을 만든다”는 다산(茶山) 선생의 말처럼, 선생의 첫 번째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배 생활 중 그의 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304권의 책을 구비했고, 선생의 책 읽는 삶이 그러했다. 평생 저술한 500여권만 봐도 얼마나 많은 책 읽기와 연구 집필에 매진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 남양주시는 다산 선생의 얼과 정신을 담은 ‘정약용 박물관’에 이어 ‘정약용 도서관’을 개관한다.
국내 6번째 규모로 22만 3천권의 장서를 갖춘 지식의 보물창고(寶庫)이다. 경기도민으로서 자랑스러울 정도로 참 아름다운 명품도서관이다. 찾는 이들에게 즐거운 명소가 될 전망이다. 그래서 책 읽기는 더욱 깊어지고 즐거워진다.
우리나라 선진들은 일찍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다. 집을 나가서는 천하의 뜻 있는 벗들과 사귀고, 집에 들어와서는 옛 성현들의 책을 읽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신라 시대에 관리를 등용할 때 그 사람의 독서 범위와 수준을 헤아려 인재를 등용하는 독서 삼품과를 설치할 정도로 독서를 권장했다. 고구려에서는 태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을 두어 경학(經學,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학문)·문학 방면의 책을 강독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이미 우수한 종이를 만들고,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성경’보다 빠른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드는 등 인쇄술의 발달로 ‘직지’와 ‘자치통감’ 등 많은 책들을 간행하였다. 성종 때는 수서원(修書院, 학교와 도서관을 겸한 기관)을 창설하여, 역사책을 등사하고 소장하게 하여 열람하도록 했다.
책 읽기(독서·讀書)는 가장 넓은 세계를 가장 손쉽게 경험하고 상상하게 만들어 주는 가장 좋은 스승이자, 자기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삶에 대한 통찰력과 안목을 길러준다. 또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책 읽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성리학이 들어온 뒤이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 계층이 역사 담당 계층으로 성장해 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르러서였다.
이 사대부들은 박지원(朴趾源)이 “독서를 하면 사(士)요,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이다”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평소에는 유가 경전과 시문·사서(史書) 등을 읽으며 한문 교양을 쌓다가, 기회가 닿으면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선비 계층은 주업이 독서였고, 독서를 통해 그들의 덕행과 학식을 쌓았던 것이다.
이런 책 읽는 문화는 유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했다. 그들의 독서토론과 연구 발표도 자연히 유가적 교육기관인 서당·서원·향교·성균관 등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조는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하고 역대의 임금들이 학문을 장려하였으므로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적이 수입되고, 국가적인 도서 편찬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많은 책들이 출판됐다. 민간에서도 수많은 문집들과 사서들이 간행되었다.
또한 집현전·홍문관·규장각 같은 일종의 도서관 시설이 설치되어 많은 문헌들을 수집, 정리, 보관하여 당시 관료 지식인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함으로써, 책 읽는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의 책 읽는 현실은 어떠할까. 1년간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는 사람의 비율은 각각 성인이 60%, 학생이 92%로 나타난다. 성인의 40%는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말이다. 참으로 ‘책 안 읽는 한국인’이다.
1909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독일 물리화학자 프레드릭 오스트발트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책 읽기’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그 세계는 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시인 볼테르가 말했던가.
하루 20분만 책 읽기에 투자하면 안 될까. 1년이면 300쪽 짜리 책 12권을 읽을 수 있다. 하루 20분만 책 읽는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우리의 삶과 지성을 건강하게 일으켜 세워보는 건 어떨까. 건강한 지성의 인생의 코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