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지난 3년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잔치로 우리나라를 ‘고비용에 멍든 국가’로 변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일자리 대란’이다. 그것은 코로나19 사태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턱없이 올린 2018년 이후 전면화한 경제 재앙의 한 단면이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큰 두려움은 전 세계가 ‘실업’이라는 전염병에 감염될 것 같다는 점이다. ‘실업’이라는 전염병이 사라지지 않고 일상적인 감기처럼 우리 주위에서 잠복하며 쉽게 대유행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4월 취업자 수가 102만명 감소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통계청도 같은 달 취업자 수가 48만명, 5월말 39만명 가량 감소했다는 통계치를 내놓은 바 있다.
통계청의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고용동향을 분석한 결과 올해 1-4월 실직자 수는 207만 6,000명으로 실직 시기를 조사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최고였다. 같은 기간 비자발적 실직자도 104만 5,000명으로 역시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4월 실직자 수와 비자발적 실직자 수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고용대란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사실 국가가 실업 문제의 해결사로 나서야 하는가에 의문이 있지만, 기업이 포기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해고와 고용의 기준은 단지 ‘이윤’이다. ‘해고’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선택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대량 실업 사태는 주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업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1997년 IMF 이후 구조조정과 지속되는 불황으로 인한 취업대란과 고용불안정을 풍자할 때 등장한 신조어 중 ‘이태백’이란 말이 있었다. 직장인들 사이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널리 퍼져 일반명사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태백’은 ‘20대 태반이 백수’란 뜻인데,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없어 ‘백수’ 생횔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외 ‘삼팔선(38세 즈음 퇴직)’,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 등이 있었는데 다시 재현되는 느낌이다.
요즘은 정말 취업하기 힘든 세상이다. 아무리 대학을 잘 나왔더라도, 청년들의 취업 문턱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높아지고 좁아지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해도 취업이 힘들어 몇 년씩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자리 충격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들에겐 훨씬 더 가혹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4월 20대(20-29세) 고용률은 54.6%에 머물렀다.
정부에서 매달 발표하는 청년 고용 지표는 꾸준히 호전되고 있지만, 실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만 나오고 있다. 눈높이를 낮춰도 일자리가 없다는 절규가 확산되고 있다.
일할 능력과 의사를 가진 사람이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일자리를 잃은 상태를 ‘실업(失業)’이라고 한다. 실업자도 늘어나고 있다. 경기침체와 코로나19 쇼크로 올해 들어 4월까지 실직자 규모가 200만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정부가 월 27만원짜리 노인 일자리를 수십만 개씩 만들어 아무리 통계를 꾸미려 해봐야, 실상이 바뀔 리 없다. 돈 되는 원전 포기로 기술자들과 일자리까지 사라졌다. 규제·노동 개혁에는 입을 다물고, 그로 인해 기업의 해외 탈출은 봇물을 이룬다.
지난해 해외 직접 투자액은 618억 5,000만달러로 사상 최대다. 이런 판에 대체 무엇으로 첨단산업 세계공장을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갑자기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어진다면, 바로 당신 자신이 갑자기 직업을 잃었다면 어쩌겠는가. 정리해고로 실직을 하든, 무기한 무급 휴가에 들어갔든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되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큰 심리적 변화까지 감당해야 한다. 어떤 직업이든 일단 실직을 하게 되면 불안의 감정이 사람을 집어삼킨다. 여기에 나이로 인한 장벽, 그리고 직업 유지의 불확실성이라는 상황까지 더해지면, 스트레스 요인은 가중된다.
심리학자들은 실직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코로나19 사태가 회복되고 경제가 활성화되더라도, 이미 탈진해 버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재기가 힘들 것이라는데 있다.
실제로 1998년 IMF 위기로 실직한 가장들이 거의 20년이 흐른 현재까지 끝내 경제적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가정이 해체된 사례들을 낯설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단순 복지 관점서 보거나 정치적 셈법이 아닌, 구조적 변화 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실직자에게는 실업 급여를 지급하지만, 사실 실직자의 82%가 고용보험 미가입자이자 비정규직이다. 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통한 ‘빵 먹을 자유’가 필요한 상황인가 보다.
화석처럼 굳은 이념으로는 한계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이대론 성장과 번영을 꿈꿀 수 없다. 말만 번드르르하다고 미래가 열려지는 것은 아니다.
‘실업’이라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는 쉽게 ‘포기’할 것이 아니라, 뜨겁게 ‘분노’해야 한다.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요구한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에 나온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M.Tomas)의 시(詩)가 있다. 죽어가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지구를 대신할 새로운 행성을 찾아 머나먼 우주로 떠나는 우주 비행사들에게, 브랜드 박사가 읽어주는 구절이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세요).”
현실에서도 어두운 밤이 다가오고, 빛은 꺼져 가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의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미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대기업들조차 정부의 금융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생존을 버텨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늘어나는 ‘이태백’들이 절규하고 있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빚이 꺼져 갈 때, 우리는 체념할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한다.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보다 정신건강에 오히려 좋다.
어쩌면 우리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쓰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