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식 박사의 ‘코로나와 동성애’ ②] 미국 동성애 역사
동성애 어의(語義)
동성애를 호모(homo)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어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애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이 용어가 동성애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69년 칼마리아 거트베니(Karl Maria Kertbeny)라는 헝가리 의사가 동성애를 모멸하는 용어인 소도미(sodomy)를 대신하여 병리학적으로 만든 용어이다.
그러다 산업화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부터 동성애를 모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후에 호모(homo) 대신 게이(gay)라는 용어로 쓰기 시작했다. ‘게이’라는 용어는 어두운 동성애자의 이미지에서 밝은 이미지의 기쁨이란 의미를 뜻한다.
원래 남녀 동성애자 모두를 지칭했으나, 지금은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킨다. 여성 동성애자는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커밍아웃(coming out of the closet, coming out stage)이란 ‘벽장 속에서 나오기, 혹은 무대로 나오기’의 축약으로, 동성애자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미국 동성애의 역사
미국의 동성애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그 전개 과정을 보면 1890년경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를 동성애 운동의 ‘발아기’라 할 수 있다. 1945-1969년은 ‘형성기’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동성애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그러다 1960년대 반전운동과 급진주의로 재기하게 되었다.
1969-1980년대는 정착기로, 1969년 6월 27일 뉴욕 경찰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선술집 스톤 월 인(Stone Wall Inn)을 급습하자 동성애자들이 공격적이고 집단적으로 저항한 데서 시작됐다. 그 후에 동성애자들은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되었다. 스톤 월 인 사태 1주년 기념행사로 시작된 게이들의 행진은 연례행사가 되어 커밍아웃을 독려하는 축제로 정착되었다.
1981-1990년에 입지를 넓혀가던 동성애 운동은 1980년대에 에이즈(AIDS)라는 예상하지 못한 돌발 변수를 만나게 된다. 1980년대에 게이들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신보수주의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
이에 게이들은 에이즈와 동성애의 분리를 시도하여, 에이즈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방안과 에이즈와 동성애와는 별개라는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DSM으로 본 동성애
미국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I)에서는 동성애를 성적 장애(sexual disoder)로 분류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이 소수 인권을 주장하라며 197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미국 정신의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동성애를 인정하라는 활동을 전개, 1973년 DSM-II에서 동성애를 성적 장애에서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장애로 전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사들은 자료를 신중하게 검토해서 이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투표로 결정했다(53%). 정신의학의 생명은 과학이다. 과학을 다수결로 결정했다는 것은 정신의학계에 있어 큰 오점이다.
이 영향을 받아 1976년 9월에 미국심리학회에서도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 등에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였다. DSM-III(1980)에서는 자아이질적(ego-dystonic)으로 수록하였고 동성애 진단 평가가 사라졌다.
DSM-III-R(1987)에서는 이 자아이질적 조항조차 삭제되었다. DSM-IV, V(1994, 2013)에서는 동성 간 성관계에 관한 단어조차 사라졌고, 대신 아동기에서 정체성 장애라는 조항만 있다. 그러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2015년 6월 26일 동성애 결혼을 합법으로 판결했다.
우남식 박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상담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