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포스트 코로나 성찰(省察): ‘사람’을 생각하다
코로나 펜데믹(pandemic) 상황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그 자리에 절망과 슬픔을 남기고 말이다. 또한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 역시 불신과 차별,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무너진 삶의 자리를 추스르기도 전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리적 ‘거리’를 만들고 ‘불신’을 키울 때,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의사들은 멀어진 사회적 거리, 심리적 안전망 붕괴로 이어지는 9월 재발설을 말하고, 상인들은 정신적·사회적 타격에 이어 경제적 충격까지 더해지면 후폭풍이 우려한다.
지금은 각 영역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협력 대응하며 버티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반기에 접어들수록 경제·사회적 취약점이 드러나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안전망이나 방어막이 붕괴되면서 여러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바이러스의 도전에 대한 응전 과정에서 얻은 포스트 코로나(Post-COVID)의 혜안도 필요하지만, 프리 코로나(pre-corona)의 회복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을 다시 보게 되고,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절망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 대한 회복이다. 낙오되는 쪽을 도와 함께 가게 하는 ‘사회 안전망’이다. 사회 안전망의 강화와 삶. 발전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민 10명 중 4명(42.5%) 이상이 우울경험의 정상 범주를 벗어났다고 한다.
특히 중증도 이상의 우울 위험군은 17.5%로, 2년 전(3.8%)보다 4배 이상 늘어났고,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국민이 늘면서 심리상담 전화도 늘었다고 밝혔다.
어찌 보면 사람이 아픈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누구나 생각지 못한 갑작스런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찬송가 가사처럼 ‘슬픈 마음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정신건강에 타격을 입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과 스트레스에 경제적 충격이 더해지면서,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그 여파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외롭게 버티고 있다. 존폐 위기에 놓인 소상공인들은 좌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질병이나 혹 전염병, 무너진 경제가 아니다. 사회라는 공동체를 버티는 시스템이 무너질 때 공동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럼 공동체가 꼭 필요한가? 공동체에 소속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과 불신과 불확실성이 반복되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질병, ‘고립과 외로움’이라는 질병이 찾아온다.
극단적 선택에 내몰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인만큼, 변화한 상황에 맞는 적극적 케어(care)는 필수적이다. 일터에서의 이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절망, ‘나를 도와줄 사람, 함께해줄 이가 없다’라는 고독과 무력감이 사회를 무너뜨린다.
이런 고통은 잊어버리자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몰라서가 아니다. 절망의 자리는 상처를 아물지 않고 더욱 벌어지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봄’(care)이 필요하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상화로 사회적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확실히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줄고 있다.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우울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다’는 답변은 68%에 그쳤다. 지난해 조사에서 86%를 보인 것에 비하면 코로나19가 무려 18%포인트를 갉아먹은 셈이다.
도움을 청할 기관이 있다는 답변은 38%에 불과했다. 이런 우울과 불안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사회적 관계가 취약해지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은 사회적 관계지수(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 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다. 우울과 불안은 높아지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위기에 빠진 사람을 제때 치료하지 못한다면 위험도는 급격히 높아질 것이다.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취약 계층이 고립되지 않도록 종교계가 위험 대상자를 조기에 발견해 전문기관의 상담 및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하고, 위기상황에서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지원하는 게이트키퍼(gatekeeper)의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감당해야 할 때다. 하지만 교회도 회복이 만만치 않다.
슈퍼선데이(superSunday)를 선포했지만, 바운스백(bounce back)이 쉽지 않다. 교회가 그동안 진행해 온 온라인 콘텐츠를 ‘비대면 격려’에 적극 활용하고, 화상 모임으로 기도 제목을 나누는 등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면, 게이트키핑(gate keeping)에 작은 도움은 될 것같다.
미국 사회학자 리스먼(David Riesman)이 1950년에 출간한『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의 책에서 다룬 것처럼, 외로운 현대인들은 ‘군중속의 고독’에 산다.
남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정작 내 맘을 터놓을 곳은 없는, 진정한 내 편과 자리는 없는 것 같은 느낌. 말 그대로 군중 속의 고독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이래저래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걸 부정하려고 아무리 노력해 봤자, 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해서 외롭거나 고독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외로움 속의 외로움, 같이 있음의 외로움…, 그러니 결국 고독의 극복은 이미 철저한 고독일 뿐이다.
디지털 시대,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오늘날처럼 보이지 않는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홀로 고독하고, 소속을 잃고 무력해 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생각,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함께 손잡고 걷던 일상의 소중함이 이제서야 깨달아진다. 코로나의 권세 앞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소소한 행복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다.
가족과 지인의 대면, 관계의 거리 복원, 가족 가치와 교제, 공동체 회복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이자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박한선 교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살률이 5배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종교 모임을 비롯한 지역사회 기반의 모임을 통해 ‘혼자가 아니다’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네트워크가 자살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삶의 방식이 무너져 내린 지금, 길을 잃은 영혼들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처럼 함께 병을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재해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다. 대구나 취약계층, 소외된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약한 자나, 밥을 굶는 학생들, 건강보험 연체나, 신용불량자들에는 회생의 기회가 멀어지고 있다.
돈과 건강 때문에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일자리는 줄어들면서, ‘실업’과 ‘실직’은 더 가혹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도 끝나지 않은 위기는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는 일이다. ‘온라인’으로는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고 공동체 교제나 활동이 없으면 삶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세월이 지나가며 어려움도 이 또한 지나 갈 것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누릴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이 지나간 자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흔적은 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반복될, 끝나지 않는 전쟁과 습격에 대비하며 적극적으로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무심, 무례, 민폐를 반성하고 고마움을 느끼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내 이웃이 건강하지 않다면 내가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함께 건강하고 함께 행복한 사회, 건강한 공동체 회복이 절실한 때이다.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