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 ‘한강교 폭파’와 ‘일본 망명설’의 진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1950년 8월 14일, 무초(John Joseph Muccio)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부를 제주도를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들고 외쳤던 말이다.
일각에서는 6.25 전쟁 당시 이 대통령이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쳤다”, “일본으로의 망명을 타진했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런승만’, ‘친일파’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사수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발언, 행적과는 배치되는 주장이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승만의 서울 사수 의지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진실을 알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6.25 전쟁 발발 당시로 거슬러 가보자. 북한 인민군은 소련으로부터 받은 탱크 242대와 항공기 226대의 압도적 전력으로 38선을 뚫고 남침했다. 파죽지세였다. 국군은 화염병을 들고, 수류탄을 두르고 탱크로 뛰어들었지만, 몸만 산화할 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인 6월 26일 정오경,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점령됐다. 의정부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불과 18km.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 탱크로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6월 27일 새벽 2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 등이 경무대(당시의 청와대)를 찾아 “각하 사태가 급박합니다. 빨리 피하셔야 겠습니다”라고 권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외치며 서울 사수 의지를 역설했다.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승만은 그때서야 참모들의 뜻에 따른다. 당시 참모들의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하다 북한군에게 생포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전시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피신 결정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대통령 피신 바로 다음날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서울에 남아있던 정부 요인과 주요 인사들, 그들의 가족까지 납치, 고문, 살해했다.
이승만이 한강다리 끊고 도망갔다고? 악마적 편집에 의한 해석!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피난길에 올랐고,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폭파에 앞서 6월 27일 밤 10시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는 “유엔과 미국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대통령 연설이 방송됐다.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이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서울시민에게는 안심하라 방송하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는 유언비어가 나왔다. 이른바 ‘런승만’이라는 조롱과 비방. 이는 전후 관계를 생략한 악마적 편집에 의한 해석이다.
먼저 6월 27일 밤,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을 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이 대통령이 대전역 사무실에 머물고 있을 때, 드럼라이트(Everett Francis Drumright) 미 참사관이 찾아와 “유엔이 북한에 대한 군사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긴급무기 원조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뒤늦게 대전에 도착한 무초 대사도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미국의 적극 개입 방침을 설명했다.
“유엔안보리에 소련이 불참한 것이야말로 러키 찬스입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전쟁은 이제부터 당신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미 대사관으로부터 희소식을 전해들은 대통령은 국민에게도 이 희망의 소식을 빨리 알리고자 라디오 연설을 한 것이다.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거짓 연설로 국민을 속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다음으로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는 전시 지침과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국군 수뇌부는 북한군 탱크가 서울 시내에 진입했을 시,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적 탱크의 도하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탱크가 서울 시내로 진입한 시간은 28일 오전 12시 30분에서 1시 사이였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시간은 오전 2시 30분이었다. 전시 지침을 따라 계획대로 수행된 폭파 작전이었다. 이를 두고 이 대통령이 자기만 살고자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국군의 퇴로와 국민들의 피난길이 막혔고, 많은 희생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전쟁 국면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 속도를 늦추고, 가장 위협적 무기인 북한군 탱크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국군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을 지원한다는 결의가 내려지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승만이 일본 망명을 타진했다고? 방심위 ‘허위 보도’라며 중징계!
KBS는 2015년 6월 24일 단독 보도라며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에 망명정부 수립 시도’라는 제목의 뉴스를 방영했다. 같은 날 KBS는 인터넷 판으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 사실이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 다음날인 25일에도 ‘전쟁 통에 지도자는 망명 시도… 선조와 이승만’이라는 제목의 인터넷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가 나간 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친일 프레임 공격이 이어졌다. 이재명 경기지사(당시 성남시장)는 자신의 트위터에 “혼자 살겠다고 한강철교 폭파하고 도망치신 분, 친일정권이니 일본도망쯤은 당연지사…”라는 글을 기사 링크와 함께 올렸다.
앞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고 도망쳤다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자 거짓임을 확인했다. 일본으로 망명을 요청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위 KBS 보도에서 증거로 내놓은 것은 일본 야마구치현 지사였던 다나카 다쓰오(田中 龍夫)의 회고록과 ‘비상조치 계획’이란 제목의 미 군정 문서이다.
먼저 다나카 전 지사의 회고록은 일개 현(縣)의 자료일 뿐, 한국 정부나 일본 외무성의 공식자료가 아니다. 한·일 양국 어느 공식자료에도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에 대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 미 군정 문서에는 애초에 이승만 정부의 망명 요청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있지 않다. 한국에서 전시 피난민이 몰려올 때를 대비한 미 군정의 대비 계획문서였을 뿐이다.
KBS 기자는 일본 취재원, 전 일본 지사의 회고록, 망명과 상관없는 미군 문서 등 일본 측 자료를 검증 없이 믿고선, 한·일 공식 외교문서 및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은 검토도 안 해보고 보도했다. 이것이야말로 시마네현의 주장에 동의하여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보도하는 것과 비슷한 친일적 행위이다.
더욱이 회고록을 쓴 다나카 전 지사는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대표적 군국주의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의 아들이다. 또 위 KBS 보도는 이승만 정부가 일본 망명을 요청한 시점이 “한국전쟁 발발 이틀 뒤”라며 회고록에는 나오지도 않는 내용을 임의 삽입했다.
위 보도를 했던 KBS 기자들은 결국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반했다는 사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인 ‘주의’ 조치를 받았다.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이라면 이를 갈았던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일본 망명설까지 운운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6.25 전쟁 와중 미국이 일본군 참전을 거론했을 때, 이 대통령이 한 발언은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이 허구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밀리고 있던 1951년 초, 미국은 일본군을 유엔군에 편입시켜 한국에 파견할 것을 검토했다. 이 사실을 안 이승만은 분노했다. 그는 “만약 일본군이 참전하면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 공산군과 싸우겠다”고 말했고, 미국은 일본군 참전 계획을 접어야만 했다.
겁쟁이, 진짜 도망자는 김일성 “최후까지 싸우라” 방송한 뒤 중국으로 도망
이승만 대통령의 도주·망명설은 거짓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경우는 어땠을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1일에는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10월 3일 아들 김정일과 일가친척들을 만주 심양으로 보낸다. 김일성 자신도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일주일 전인 10월 12일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도주한다.
김일성은 도주하며 ‘조국의 위기에 처하여 전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녹음 연설을 방송한다. 연설 주요 내용은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면서 싸우라”, “어떤 일이 있어도 현물세를 바치라”였다.
김일성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북한 주민의 피와 땀을 착취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평양을 떠날 때 탔던 차는 소련제 고급 승용차 ‘볼가’였다. 김일성은 도주 중 상황이 여의치 않자 청천강변에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이 차는 나중에 국군에게 노획된다.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통화로 도주했고, 1951년 1월까지 강계에 중앙당 연락소를 설치하고 주요기관은 만주로 옮긴다. 김일성이야말로 저만 살겠다고 도주한 뒤 중국에 망명 정부를 차린 것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행보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6월 27일까지 서울을 사수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가 서울을 떠날 때 탔던 교통편은 차창은 깨져 있고 좌석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낡은 2칸짜리 3등 열차였다. 그는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한반도를 사수했다.
애민의 지도자 이승만, 그의 구국의 기도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자료와 기록을 다시 읽으며,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지도자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낙동강 방어선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창 밖에서 고통받는 국민들을 생각하며 창틀을 움켜쥐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이제 결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 한 명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언제쯤이면 온 국민이 이승만의 생애, 그분의 마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선진들의 피와 땀과 눈물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자유의 헌정체제는 계속될 수 있을까? 한국교회는 다시금 복음으로 일어날 수 있을까?
여러 상념에 사로잡혀 뒤척이는 밤이 부쩍 늘었다. 낙동강 방어선 앞에 선 느낌.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시절이다.
평생을 독립과 건국을 위해 바쳤고,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며 호국의 사명을 다했던 이승만의 생애, 그의 간절한 기도를 떠올린다.
그는 더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시절을 믿음으로 걸어갔고, 기적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도망자, 비겁자, 반역자 김일성의 길이 아닌 기도자, 사명자, 순교자 이승만의 길을 걷고자 한다.
그 길을 따라 북한해방, 자유통일, 세계 선교의 사명, 그 기적의 새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을 다짐하며 기도한다.
“하나님, 이제 결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김성훈
연세대에서 화학(학부) 및 의과학(석사 수료)을 전공했고, 건국대 안보재난관리학과(국가안보전략 전공)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월간조선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총무, 이승만기념관 자문위원, 청년한국 아카데미 및 히즈코리아 강사로 활동 중이다.
※‘월드뷰 6.25 70주년 특집’ 2020년 6월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