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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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설교문] 감사와 회개의 눈물 흘릴 수 밖에

본문: 요한계시록 2장 8-10절, 마태복음 25장 34-36절

김명혁 목사님의 설교문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며’를 소개합니다. 순교자 故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해당 설교문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널리 알려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설교문 앞부분 개교회 관련 내용은 다소 편집했습니다. 전문은 김명혁 목사님 홈페이지(http://www.kbpc.or.kr/r/)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아들을 죽인 원수를 품었던 손양원 목사의 모습.

▲아들을 죽인 원수를 품었던 손양원 목사의 모습.

제가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소개하는 설교를 여러 번 했는데, 오늘은 손양원 목사님 자신의 진솔한 고백적인 말씀들과 그리고 몇몇 분들의 진솔한 고백적인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귀중한 가르침을 생생하게 받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진솔한 고백들을 인용하면서 설교하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진솔한 고백들을 소개하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쓴 저 자신의 고백적인 글을 먼저 소개합니다.

“제가 서울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을 때 어느 여름 날 아침 남대문 네거리에 있던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 들고 제가 새벽 기도 후 거의 매일 올라가서 30분 이상 기도하던 남산 숲 속 어느 나무아래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하루 종일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은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과 섬김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전도사님 때부터 여수에 있는 애양원에 가서 나환자들을 돌아보는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 환자 어린이들과 함께 산으로 소풍을 갔습니다.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환자 어린이들은 자기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혹시라도 자기들 때문에 나병에 걸릴까 봐 걱정을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서 자기들끼리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것을 눈치채고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의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려고 했습니다. 나환자 어린이들은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그들의 도시락을 빼앗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문둥병에 걸리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도 문둥병에 걸리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순수하고 참된 사랑과 섬김을 느끼며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가 사랑하던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서 죽인 마귀 새끼 같은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대신, 그를 용서하고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원수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미워하지도 않고 죽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를 용서하고 사랑했을까? 말로만 용서하고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을까?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말인가!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께서 사랑하면서 살기를 소원하시는 간절한 기도의 말씀 하나를 소개합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셋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원수 용서와 원수 사랑에 대한 눈물의 고백의 말씀 하나를 소개합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 2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를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아들들을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해. 내가 그를 구해서 아들을 삼겠다고 해.”

넷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께서 두 아들의 장례식 때 하신 9가지 감사의 인사 말씀을 소개합니다.

“여러분들 내 어찌 긴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 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조명한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중 한 장면. 안경선 씨와 손동희 권사가 포옹하는 모습.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조명한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중 한 장면. 안경선 씨와 손동희 권사가 포옹하는 모습.

다섯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천국소망의 기도와 찬송 시를 하나 소개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아버지가 지닌 천국 소망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었다. 나병 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여섯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반대로 해방이 될 때까지 5년 동안이나 형무소에 갇혀서 갖가지 옥고를 치르시면서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찬송가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 몸에 소망 무엔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웬 말인가 날 위하여”,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울어도 못 하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등이었다고 합니다.

이 10곡의 찬송가마다 손양원 목사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와 신앙 고백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40년 신사참배 반대 및 거부로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투옥된 손양원 목사님은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쇠약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나 감사해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을 온 마음 다해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난과 핍박 중에도” 찬송을 부르시면서 순교하기를 소망하셨다고 합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이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아멘.”

이 찬송은 손양원 목사님께서 여수 순천사건 당시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들은 후부터 장례식이 모두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힘차게 부르셨던 찬송가였다고 합니다.

일곱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죽인 안재선이 손 목사님의 양자가 되어 자기의 살인죄를 고백하면서,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아버님 전상서. 천부님의 은혜 가운데 아버님 어머님 기체 만강하심을 비옵니다. 소자는 객지서 하나님의 진리의 힘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감사합니다.

이 죄인은 아버님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회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중생하였습니다. 중생하였으나 소자는 인간인 고로 때때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심을 진실로 감사하며 죄를 회개합니다.

중생하고 보니 하나님께 몸 받쳐야 되겠습니다. 나의 있는 것 모든 것 다 받쳐야 되겠습니다. 우리 신자는 다 순교할 의무가 당연히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기도의 덕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의 피 공로로 중생하였으니 손양원 목사님의 장남 될 자격으로 중생의 양식을 언제나 잊지 않고 빽빽이 채우겠습니다.

아버님 모든 것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님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니 사도 바울의 뒷길을 따라가고자 한걸음 두 걸음 걷고 있습니다. 두 형님의 뒤를 따를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나이다. 1949년 9월 15일 편지 받아본 즉시 저녁 안재선 상서.”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님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한신학교에 다녔고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서울 이태원 외국인 아파트 경비 일을 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둡게 살다 1979년 12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손동희씨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젠 이런 것, 저런 것, 슬픔도, 미움도 한갖 꿈에 본 듯 잊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떠나려는 그의 옷자락 붙들고 우리는 목을 놓아 소리 높여 울었다. 한이라도 풀듯이 …

미움이 애처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여전히 울음 섞인 음성으로 나에게 자기의 진실을 말했다. ‘동희야,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련다.’

그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난 그는 정확히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지금쯤 저 천국에선 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빠와 재선 오빠가 손에 손을 잡고 이 시간 집필하는 내 모습을 지켜 보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故 손양원 목사의 손녀인 손동희 권사가 고인을 회상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故 손양원 목사의 손녀인 손동희 권사가 고인을 회상하고 있다. ⓒ신태진 기자

여덟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친구였던 방지일 목사님께서 쓰신 ‘내가 만난 손양원 목사’라는 제목의 진솔한 회고의 글을 소개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평양신학 내 한 해 후배이다. 그때는 학생 수가 도모지 100여명으로 삼학년 한 반이 30명 상하이었다. 그러니 서로 친밀하게 지내며 지낸 것이 지금도 크나 큰 추억이기도 하다.

손양원은 키가 퍽으나 작은 분이라 때로 농담으로 ‘양원아 좀 서서 다니라구 그리 앉아서 아장거리는가?’ 그런 말을 하군 했음이 큰 인상적이었다.

손 목사님은 그 인간성이 매우 유순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라 서로 사괴는데 쉽게 서로 다정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신 천성을 타고 나신 분이라 뉘와도 잘 어울리시는 분이었다.

우리 평양신학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었고, 학생들 중에 테니스 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 중에 한 분이 손양원 목사이시다. 워낙 작은 키시라 운동장에서 테니스 할 때면 구경하는 이들도 많았다.

손 목사는 그 작은 키에 오독 오독 뛰시면서 하는 양상이 더욱 보암즉하여 그가 할 때는 가서 보는데, 더욱 자미가 있었다. 보면서 응원도 하고 웃기는 이야기들로 오고 간 말이 있었든 것도 벌서 5, 6십 년의 일이지만 추억에 선하게 띠워진다.

나는 그보다 한해 앞서 졸업하고 안수를 받은 다음 선교사로 파견을 받아 중국 산동으로 갔다. 21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다가 공산 정권의 추방으로 한국에 1957년 9월 돌아와서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으심과 자신도 순교하셨음을 들었다.

순천 애양원에 몇 번이나 찾아가서 묘소를 방문도 하고 그의 목회하던 애양원교회 집회도 그 몇 번이나 인도하였다. 그리고 손 목사님에 대한 추억을 저들에게서 생생하게 듣기도 하였다.

금년이 그의 순교 60주년이라 전국교회가 그를 바라보면서 추모예배를 드리게 되어 우리 주님께서 흐뭇하실 것이고,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과 같이 우리를 지켜보시는데 앉아계시지 못하실 듯하다. 서서 보실 것으로 사료되기도 한다.”

아홉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존경하며 그리워하는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님의 ‘아! 孫良源 목사님이 그립습니다’라는 제목의 회고의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에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경외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산돌 손양원 목사님과 소양 주기철 목사님 같으신 분입니다. 한국교회의 희망의 등불로 선물해 주셨습니다.

산돌 목사님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견고함을 위하여 허락하신 하늘의 보물입니다. 산돌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본질 수호를 위하여 허락하신 영적 나침반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신앙의 고매한 절개를 지켜내셨다면, 산돌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신사참배 반대를 통한 신앙의 정도를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주님의 제단에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순교의 제물로 올려드렸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목사님은 공산군에게 잡혀 자신 또한 순교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목사님은 남북 동족상잔 비극의 현장에서 화해와 용서를 통하여 복음을 온 몸으로 써 내려 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후예로 자처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모습을 직시할 때, 우리는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신앙의 정도를 걸었던 손양원 목사님의 고매한 신앙을 회복하는 길만이 소망의 길입니다.

복음을 입술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써 내려 갔던 목사님의 주님 사랑이 그립습니다. 여수 애양원에서, 광주 형무소에서, 청주 교도소에서 긴 겨울 밤 찬바람을 맞으며 목사님께서 눈물로 부르시던 찬송소리가 그립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교회와 민족의 소망임을 알아 온전히 주님께만 사로잡히기를 갈망하셨던 목사님이 그립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미 주님 품에 안기셨으나,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목사님의 걸어가신 길을 따라 신앙의 정도, 목회의 정도를 걷기를 소원해 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신 손양원 목사님을 은혜의 선물로 허락하신 주님의 높으신 뜻을 찬양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사랑하기를 원했고 닮아가기를 원하셨던 주님을 우리도 사랑합시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신 주님을, 우리도 온 몸과 마음으로 더욱 사랑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의 주님!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아멘.”

열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이 아버지는 ‘민족주의자가 아닌 오직 한 분 예수주의자였다’는 입장을 강하게 발표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2014년 2월 6일 한 세미나에서 이만열 명예교수가 ‘손양원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신앙을 넘어 민족주의적 운동’이라고 평가한 것과 관련해, 손동희 권사님은 ‘손 목사는 오직 한 분! 예수주의자였다’라는 입장을 강하게 발표했습니다.

“손 목사는 ‘민족주의자냐? 복음주의자냐?’ 하는 질문을 초월한 분이십니다. 그런 근거 없는 질문을 주고받고 하는 대상 위에 놓일 사람도 아니며, 오직 예수주의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1940년 투옥돼 5년간 옥중생활. 일본 간수와 대화한 대화, 심문 조서, 옥중 편지. 시, 수필 등등을 볼 것 같으면 민족주의적인 말은 한 마디도 없고, 오직 복음 전도뿐이었습니다. 일본 간수와 주고받은 대화 내용도 모두 전도였습니다.

5년간 감옥에 있을 때도 인간적인 언어나 민족주의적인 말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손 목사는 하늘을 향해, 단 한 길만 걸었습니다.”

▲김명혁 목사. ⓒ크투 DB
▲김명혁 목사. ⓒ크투 DB

열한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이 지난 날들 돌아보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쓴 아주 진솔한 고백의 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신앙 사상을 더욱 깊이 알게 된 것은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 옥중목회’를 엮으면서부터 비롯됐다. 아버지의 걸어갔던 발자욱을 낱낱이 더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잠을 깬듯, 비로소 아버지의 모든 신앙 사상을 알게 됐다.

아버지를 이해 못했던,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철부지 시절에 그토록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던 나는 성인이 된 오늘날 옥중편지와 심문조서 등을 엮으면서 아버지와 마음의 대화를 수없이 교환했다. 애틋한 그리움을 느끼면서….

아버지의 생애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땐 행복이란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불행한 삶을 살다 가셨다. 인생은 장막생활이라고 자주 말씀하시더니 그 말씀 그대로 사랑하는 두 오빠를 앞세우고 고작 48세의 한 많은 삶을 살다 가셨다.

나는 험악했던 아버지의 짧은 삶을 마지막 길을 떠나실 때까지 곁에서 지켜 보았다. 정말 그랬다. 아버지는 험한 山을 넘고 나면 더 큰 山이 나왔고 그 다음 山을 넘으면 또 다른 山이…,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좌절하지 않았고 ‘아픔도 약이 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그 산속에 묻혀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캐내시곤 했다.

그 옛날 아버지는 감옥에 계시고 우리는 배고파할 때, 어머니는 ‘도둑질은 죄가 되지만 얻어먹는 것은 죄가 아니야’ 하시면서 바가지 들고 구걸하러 나서는 것을 작은 오빠가 어머니 치마자락 붙잡고 늘어지면서 ‘엄마! 이러시면 나 집 나갈테야’ 하며 울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그때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고난을 꿀같이 달게 받으라!’,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법이라.’ 그 시절 우리는 아버님 편지만 먹고 살았다.

그러다 내 나이 12살 때 나와 동생은 의지할 곳 없는 고아원에 버려져, 부모 정에 굶주려 외롭게 성장했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가다 나중엔 그리움이 원망으로 바뀌어 버리기까지 했고, ‘원망’이 겹치고 겹치고 나더니 끝내 이것이 미움으로 돌변하여 부모에 대한 미움은 눈덩이처럼 쌓여가기만 했다.

‘꼭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했나…’ 하고 나 스스로 그 역경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어떻게 이날까지 살아왔는지 모른다.”

“한때는 우리들에게도 기쁜 날이 있었다. 그것은 8.15 해방과 함께 아버지가 감옥에서 출옥했던 날이다.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자 물 만난 고기처럼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아버지 곁에 따라 누워 팔을 베고 재잘거리던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년 가지 못했다. 뜻밖에도 심술궂은 6.25가 터지자 아버지는 이 땅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고, 또 하나의 가슴 찢기는 일은 여순 반란이 몰고 온 폭풍우 속에서 내 곁을 떠나버린 두 오빠의 순교다.

왜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이 엄청난 비극을 줘야만 했던가? 그들을 빼앗긴 나의 분노는 ‘신’을 향해 끝도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만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아득한 옛날을 돌아보면 아버지와 두 오빠의 환영은 아직도 별처럼 빛나고, 더욱더 생생한 옥중편지와 심문조서는 아픈 가슴에다 더 큰 못질을 했다.

만일 그때 아버지에게 옥고의 연단이 없었던들 훗날 어떻게 죽음을 불사할 믿음이 생겼을까 싶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몸부림 쳤고 그때 그 얼어터진 손으로 쓰신 편지!! 한자 한자 떨면서 쓰신 시 그리고 수필!! 일본형사들이 고함치며 주고받던 아픔이 담겨 있는 심문조서!!

이러한 눈물 어린 글들을 이대로 영원히 묻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아버지의 일부’를 없애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또 내 아들 박유신 목사도 옥중편지를 읽고 ‘어머니, 이 편지는 손양원 목사님의 잠언입니다’ 하며 책을 만들라고 적극 권면했다.

그래서 늦은 감은 있지만 지상에 공개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아버님의 옥중 편지는 긴 세월 동안 어머니가 꼼꼼히 간직했다 해방 후 안용준 목사님께 넘겨주었는데, 옥중편지를 1952년 <파수군> 책에 7회에 걸쳐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옥중 심문조서는 아버지의 신앙 사상을 가장 잘 알던 고 안용준 목사가 해방 후 광주지방검찰청장 원택연 장로께 부탁해 발굴해 냈던 것이다.

이 기회에 이러한 옥중편지, 심문조서, 시, 수필, 일기 등을 정리해서 책을 엮어냄으로써 맏딸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기도로 후원해 주신 보이스사 사장 권승달 장로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전을 받기를 바라는 바이다. 2000년 3월 부산에서 손양원 목사의 맏딸 손동희 권사.”

이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너무너무 감동적인 진솔한 신앙의 고백들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한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진솔한 고백들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과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기념예배 및 특별강연이 한국교회총연합 주최, 예장통합 총회 주관으로 18일 오후 5시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렸다. ⓒ크투 DB
▲6.25 한국전쟁과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아 기념예배 및 특별강연이 한국교회총연합 주최, 예장통합 총회 주관으로 18일 오후 5시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렸다. ⓒ크투 DB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귀중하고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들의 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들은 무릎을 꿇고 부끄럽고 뜨거운 감사와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리게도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여! 세속주의와 인본주의로 치닫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들에게 가난과 고난과 핍박의 재난이 필요하시다면 우리들에게도 가난과 고난과 핍박의 재난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부족한 우리들도 ‘회개’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삶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게 하시고, 그리고 ‘제물 되는 순교적인 죽음’을 죽게도 하시옵소서!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도를 의지하며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선교 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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