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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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고봉(高峯) 김치선(金致善, 1899-1968)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로서의 신학적 업적보다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 창립자라는 영적 유산과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어졌던 그의 목회적 감화력과 민족 복음화운동의 창시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미국 유학하여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신학자로서 바로 현장목회에 투신하여 회개와 복음화를 강조한 목회를 하였고, 그의 목회는 항상 결실이 있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에도 회개가 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회개가 중심된 목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봉은 설교문과 신학의 글이나 강의안을 남겼으나 그의 전공인 구약학에 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 「신명기의 모세저작」(Kim, Chi Syun. 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1935;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오경과 모세』. 서울: 선교횃불, 2015)과 『구약사기(舊約史記)』 외에는 학술적 논문이나 저서를 남기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1948년 대한신학교를 세웠고 1951년부터 1960년에 총회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고 1955년에 391쪽이나 되는 상당한 분량의 신학적 저서 『구약사기(舊約史記)』를 출판했으나 한국구약학회에서 그의 학술적인 논문과 저작에 관하여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봉은 구약사와 함께 에스겔, 소선지서와 함께 예레미야서를 강의하였다. 1950년대 선지서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가 적었던 시기에 현재 세 권이 남아 있는 그의 구약과 관련된 강의안 소개와 평가는 없다. 구약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기여는 묻혀지고 있다. 이제 한국개혁신학회가 그의 학문적 위상과 기여를 밝혀야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고봉이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 신학자라는 평가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은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을 때 제3의 교단인 대신 교단의 창립자요 교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고봉은 그의 인격 안에 보수신앙과 애국사상이 하나로 결합된 민족 지도자로서 기독교 1세대로서 근본적으로 역사적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이것을 목회와 신학교육에서 회개와 민족복음화로 실천하고자 했던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민족 복음화운동라는 위대한 유산을 한국교회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필자는 고봉의 개혁신학사상을 그의 다음 11가지 특징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정통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민족복음화운동 효시

고봉은 함경남도 함흥(읍 서호리 바닷가 어촌)에서 조부가 40척의 배를 소유한 선주(船主)인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10대 청소년기 부터 독실한 신앙으로 애국정신을 가진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함흥지역의 리더로 낙인찍혀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刑)을 살고 나왔다. 함흥으로 돌아와 학업에 전념했고 선교사 함흥 파송 캐나다 선교사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 ?-1949)의 영생중학교(중고등 합제 5년제)를 1922년 졸업했다.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은 캐나다 선교사로서 한국으로 귀화한 캐나다계 한국인이다. 그는 1906년부터 함흥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가끔 서호리에 오곤했다. 김응보 옹은 영재형 선교사에게 어린 고봉의 어려운 형편과 아울러 영특함과 착실함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신원을 책임지겠다고 추천하자 엄재형 선교사는 그런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기가 키우고 공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어린 고봉과 영재형 선교사 사이에 인연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캐나다 교회는 서로 연합하게 되는데, 영재형 선교사는 이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은 잔류파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철저한 개혁주의자 선교사였다고 한다. 예장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이 이 선교사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고봉은 장로교 미션학교인 영생중학교에서 특히 그의 양(養)아버지가 되어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영재형 목사로부터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 주권 신앙을 배웠다.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한학기 수학하였다. 고봉은 장로교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지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개혁파 신학교인 고베(神戶) 중앙(中央)신학교(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 1907년 세운 고베신학교와 1903년 북장로교에서 세운 전도동지관, 1920년 오사카(大阪) 신학원으로 개명, 다시 두 신학교가 1927년 합병하여 개명한 개혁파 신학교,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을 수용하는 역사적 개혁파 로선을 따름)에서 수학(修學)하고 1930년 졸업하였다. 고봉은 보수적인 개혁신학교인 고베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 사역한 영재형 목사를 따라 다니면서 일본에 사는 한인 교포들에게 전도하면서 영재형 목사의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신앙을 배웠다.

▲김치선 목사. ⓒ대한신학원대학교
▲김치선 목사. ⓒ대한신학원대학교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1933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하였다. 고봉은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반대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세워진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앙을 배웠다. 그리고 고봉은 1935년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권」(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으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제는 구약에 관한 제목이었다. 그는 1930년대 김재준, 유형기 등이 평양신학교에 도입한 모세오경 문서설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성경신학입장을 가졌고, 박형룡과 박윤선이 가졌던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고봉은 학위를 받고 1935년 귀국한 후 1936~1937년 고향인 함흥 서호리에서 목회 활동하다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1937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메구로(目黑) 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4년 귀국하였다. 고봉은 1944년 장로교회인 남대문교회(1885.628 알렌 선교사댁에서 개척 설립)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다. 당시 남대문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서울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서 다니러 오는 나그네들이나 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이 교회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회였다.

해방이 되자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켰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사회운동단체이자 정치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많은 목회자들이 가담하였다.

고봉은 정치활동이나 주류교단 활동에 참여하지도 않고 3백만 구령운동이란 제3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는 민족복음화 운동에 전념하여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키면서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1948년 야간인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을 길러내었다. 그는 장로교 총회신학교에서 1951년에서 1960년까지 9년 동안 교수로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가 설립한 대한신학교에서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요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서 활동하였고,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학생들에게 회개와 함께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고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었다.

2. 보수적, 성실하고 실천적 인격 신앙

고봉은 마을 서당의 훈장이자 개혁 개방의 향촌의 민족주의적 유교 지식인으로서 기독교가 서호리에 들어오자 누구보다도 먼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던 김응보 옹(翁)의 영향을 받아 신앙인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되던 암울한 시기에 10대(代) 소년으로 6년이나 매일 새벽 내호교회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였고, 그 시기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가졌고, “너는 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함흥에 와 있던 영재형 선교사가 서호리를 방문한 것이다. 김응보 옹(翁)은 어린 고봉의 신앙과 영특함에 대해 칭찬하며 학업 지속하기에 가정 형편의 어려움에 관하여 영재형 선교사에게 말하면서 신원을 보장하겠다고 그를 추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재형 선교사는 '그렇게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신이 키우면서 공부시키겠다'하고 고봉을 함흥 발룡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사환 일을 시키며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어린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 집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은 장전을 향해 화전민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선교사 집에서 잡일을 도우면서 선교사와 부인의 비서 역할까지 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가 세운 영생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선교사 집안일을 도우는 가정 총무 역할을 했다. 요셉처럼 힘든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착실하고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일을 처리하여 선교사 부부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고봉은 서당에서 배운 실력으로 영재형 선교사가 세운 장로교 선교학교인 영생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선교학교는 민족정신이 강하게 강조되는 곳으로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생중 · 고등학교 내에서는, 학생들이 비밀리에 한국 애국자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봉 역시 그런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흥지역 학교 비밀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1919년 3월 1일에 있을 민족의 봉기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하였다. 고봉의 참여는 민족 정신이 투철한 영재형 선교사의 신앙 훈련에 영향을 받았은 것이다. 고봉은 이 3.1운동 참여 일로 인하여 일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20살의 나이로 함흥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출옥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

1년 후 김치선은 출옥하여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1922년 3월 13일 23세의 나이로 영생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치선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이 때 고봉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1923년 어느 날 방학을 맞이하여 함흥의 집으로 돌아와 영생고등학교 옆에 세워진 신창리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던 고봉은 밖에서 들려오는 “불이야! 불이야!”하는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영생 중·고등학교 쪽에서 들여오는 소리였다. 김치선이 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학교는 이미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불은 당시 서양 사람인 영재형 목사가 한국 학교인 영생 중 · 고등학교의 교장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영재형 목사를 죽이기 위해 놓은 불이었다. 그들은 영재형 목사를 교장실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질렀던 것이다. 고봉은 이불에 물을 부어 자신의 몸에 뒤집어 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선교사를 구출한다. 그는 자기를 키어주고 공부시켜준 은인(恩人)을 위기의 순간 살렸다는 보은의 자긍심을 가졌다. 이처럼 고봉의 생명을 건 구출작전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영재형 선교사는 이 일 후에 고봉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더욱 특별히 사랑하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교사 부인은 너무 놀라 화병을 얻어 별세하게 된다. 별세 전에 부인은 남편에게 “치선이를 끝까지 돌보아주고 공부시켜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 선교사는 그 유언을 실천하여 고봉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이어서 1930년대 미국 달라스신학교에 유학시켜 1935년 한국인 최초로 신학박사를 받게 지원을 해준 것이다. 1949년 영재형 선교사가 별세할 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한 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 치선이를 얻은 것이다.”

1927년 3월 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평양신학교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1928년 일본에 있는 한인(韓人)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가 고봉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고봉은 일본 고베 현(縣)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現, 개혁파신학교)에 편입하였고, 그곳에서 영재형 선교사를 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일본에 건너 온지 2년만인 1930년 2월 23일, 고봉은 31세 나이로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재형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일 조선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고봉은 그 다음 해인 1931년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29년 메이천 등 프린스턴 구학파 학자들이 세움)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에만 매진한 끝에 1933년 Th. M.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고봉은 다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 취득하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식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고봉은 달라스신학교 유학시에도 외부와 단절하여 오로지 학교 기숙사, 강의실, 도서관, 식당에만 오가면서 학업에 매진하였다. 자신의 신학공부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하고 외로움을 참고 인내하면서 형설의 공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세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이 지배하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풍토에서 모세5경의 모세저작설을 학위논문을 쓸 만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유학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가 달라스에서 공부했을 때 달라스는 세대주의자와 복음주의자 학자들이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고봉은 이미 고향교회에서부터 신앙생활에서부터 목사안수와 신학석사까지 장로교회와 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 고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획득하였기 때문 그는 세대주의나 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계속)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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