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용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기만 한 하나님?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오는 2월 17일 오후 2시 서구 치평동 광주 무진교회당에서 ‘마가복음 강해’라는 주제로 석학초청 특별강연에 나선다.
이번 강연은 전남광주목회자 콜로키움 운영위원회 주관으로 열리며, 도올 김용옥 선생과 기독교 성경의 핵심사상과 시대의 상관성을 접목시키고자 마련됐다.
1부 강연에 이어 2부 대담에서는 김주한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이 좌정을 맡아 한신대 류장현 신학부 교수, 김판임 세종대 대양휴머니티 칼리지 교수가 토론을 갖는다.
전남광주목회자 콜로키움은 기장교단 소속 전남광주지역 목회자들이 조직한 목회자 계속 교육 프로그램으로,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사고 및 목회역량 강화를 목표로 지난 2006년 발족했다. 매년 분기별로 국내외 성서학자들을 초청해 성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토론하고 있다.”
위 기사는 올해 정월 중순경 한 지방 신문에 실린 것이다. 늘 ‘한신대 석좌교수’라는 이름이 빛나는 훈장처럼 따라다니는 도올은 최근 인터넷에 게재한 동영상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란 것이 하늘에 앉아 인간에게 무슨 그 명령 질투 사랑 도륙 전쟁하고 협박 엄포 믿음 강요하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중용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기만 한 하나님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또 그는 말하길 “고린도전서 13장인 ‘사랑 장’은 하나님의 성품과 무관한 것이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인들이 하나님의 포악한 성품에 아주 질린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윤리를 세우기 위해 바울이 이런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되는 ‘사랑 장’을 써서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행함에 대한 지침을 내리게 된 것이다”라는 망령된 주장을 폈다.
도올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그릇된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말하자면 바울과 하나님 사이를 적대시하고,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사이를 적대시하는 주장을 서슴없이 펴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은 반드시 증오의 주체가 된다며, 성경의 하나님을 주로 사랑이라는 미끼로 인간을 옭아매어 인간을 협박하는 주체로 전하고 있다.
그는 한 마디로 동양사상에 나오는 ‘성(誠)’이 천리를 구현하는 인간존재의 도덕적 핵심’이라고 치켜세우기 위해, 이에 대비하여 성경의 하나님을 한껏 깎아내리고 업신여기고 있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도올에게 ‘천지불인(天地不仁)’, 즉 무심한 자연재해 등으로 자비와는 거리가 먼 자연의 가혹한 현상에는 도덕적 의미와 당위가 특혜인 양 주어지고 얼마든지 미화가 가능한 반면, 기독교의 하나님 사랑은 천지와 인간 세상을 파괴하는 끔찍한 유위의 소산으로 둔갑된다.
아무리 한자가 특별해 보이고 중국 사상들의 이론이 뭔가 장황하고 표현들이 다양한 것 같아도, 또 인도의 ‘아뢰야식’이니 하는 류들이 아무리 이론이 치밀해 보여도, 그 요지는 모두 다 우주 만유의 운영의 주체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인간 자신이며 인간이 하나님, 우주 만물과 일체라는 것이다.
도올이 아무리 중용이 불교적 ‘공론’과 기독교적 ‘경건성’을 합한 진리의 총체라고 선전해도 이것이 ‘성론’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없는 것은, 창조주를 모르지만 창조주의 성품인 인간에 내재한 선험적인 도덕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자사’로선 이와 비슷한 ‘성’ 개념의 도입이 부득이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중용의 ‘택선’, 즉 ‘선’을 택해 굳게 잡고 성실하게 나가기만 하면 이 세상이 인간의 능력으로 만사가 해결되고 구원에 이르는 어디 그런 단순한 인간 세상인가?
중용의 ‘성’, 즉 ‘성실’에 모든 이 세상의 ‘덕’의 개념을 지극 정성으로 쏟아붓는다 해도, 성경이 말씀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벧후 1:4)”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천양지차의 간극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로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우애, 사랑’의 자질 배양을 통해 우리는 성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되고, 거룩하게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중용에서 중요한 것이 ‘나’의 ‘택선’이라면, 기독교에선 하나님께 ‘선택’된 ‘나’인 것이다.
도올이 말하는대로 중용의 성실을 경주하다 어느 날 갑자기 꽥 하고 죽어버리면 되고 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주님을 영접한 자녀로서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의 사명을 굳게 잡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
도올의 설명대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외재적 실체성’으로 인지되고, 불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저 심리적 작용으로 치부하고 마는 ‘없는 존재’로서 양자의 본질이 상이하다.
그러한데도 도올은 이를 분별할 만한 사고력이나 인격에 장애가 있는지 무턱대고 기독교 흠집내기 식으로 어린애 종교라 비웃고 있으니, 그가 숭배하는 중용의 ‘군자신기독(君子愼其獨)’과도 사뭇 거리가 멀다 하겠다.
그는 나열하는 어휘의 대부분을 서양식에 따르면서도, 뭔가 논리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교묘히 동서 대결 모드로 전환해, 무조건 값싼 인종적 편가르기로 순진한 시청자들을 현혹함으로써, 자신의 허술한 논리를 포장하는 트릭에 익숙한 모양새다.
여기에 도올은 칸트의 자연관마저 끌여들여 은근슬쩍 천지도며 자연인 동시에 당위라 주장하는 중용의 ‘성’과 연결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의 지성적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전제한 칸트 철학의 자연관은 목적론적이라, 목적론과는 무관한 중용의 ‘무위’와는 전혀 근본이 다르다.
칸트는 인간과 자연, 모든 유기체의 존재엔 어떤 자체적인 의도와 목적이 있다고 보았는데, 인간만이 단연 세계의 중심에 있고 합리적인 도덕적 주체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자연은 인간보다 하위의 개념이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만약 칸트가 도올이 인용한 대로 “인간이란 존재의 궁극적 당위성은 자연에서 온다”고 했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존재와 행동엔 자연이 가진 합목적성을 이뤄줄 당위가 있다는 것이지, 자연에 인간이 지향할 궁극적 당위성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도올은 뜬금없이 “자연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당위다. 당위의 근본이 인간의 몸이다. 몸은 자연 천지 그 자체 귀신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성경의 하나님도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왜곡하는 판이니, 그까짓 칸트쯤이야 대수도 아닐 것이다.
실로 의문이 든다. 위 기사에 난대로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강의에 참석하였던 두 교수들-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영성을 겸비케 함으로써 한국교회와 인류 사회에 기여할 전문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교육 목표를 두고 있다는 한신대원에 소속된 두 교수들은, 과연 도올에게 학문과 경건의 조화를 이룬 신학적 소양을 지니도록 제자들을 양육하고 목회 지도력을 리드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교묘하고 트릭키한 어휘 구사력과 진정성 없이 요란한 현학적 표현들에 현혹되어 갈피를 못잡고 있는 것인가?
이 외에도 도올은 무슨 평화나무 인가 하는 모임 같은 데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런 기괴한 일이 왜 자꾸 한국 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평화나무 설립자에 대해 찾아보니 그는 ‘개신교가 하나님의 용서 속에 서 있는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작은 자 하나 실족하게 만드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묶어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낫다’는 말씀을 새겨야 한다고 했을 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구현하려 노력하고 빛은 못 돼도 썩지 않는 소금 정도는 돼야 한다”고 주장한 장본인이 아니던가?
뭔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석연찮은 느낌을 도무지 지울 수 없다.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