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 정권을 승계하자마자 김정은은 북한헌법을 개정하면서 헌법서문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명시했다. 2013년 12월, 장성택을 처형한 이후, 리더십을 확보한 김정은은 2014년에 국가목표를 ‘백두산 대국’이라고 공식 선언하였다. 당시에는 백두산 대국이 백두혈통으로서 김정은의 권력 승계에 대한 정당성 차원으로 해석되고 평가되었다. 현재도 이런 입장이 우세하다. 2018년, 신년 초부터 시작된 김정은의 평화공세 전략으로 ‘백두산 대국’의 목표지점은 베일 속에 가려졌었다.
그런데 2020년, ‘정면돌파의 해’로 슬로건을 내세우며 2017년 당시로 회귀한 북한은 이젠 노골적으로 ‘백두산 대국’의 종착지를 드러내고 있다.
‘평화수호’, 북한 고도의 연막전술
2014년 ‘백두산 대국’을 선포한 김정은은 다음 해인 2015년 8월에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백두산 정상에서 핵무력을 백두산 대국의 가장 귀중한 정신적 양식이라고 제시했다. 백두산 대국 진입을 위해서는 핵무력이 절대 요소라는 뜻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영의 양식이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김정은은 핵무기를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라고 지칭했다. 핵무기와 평화수호를 연결시킨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이로 인해 북한이 내세우는 ‘평화’의 의미가 감춰졌다.
백두산 정상에서 핵무기를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라고 부른지 2개월 후에 공교롭게도 김정은은 ‘평화 수호자’라는 의미가 담긴 국제평화 인권상을 수여한다. ‘수카르노의 별’이라는 상으로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를 기념하여 수카르노 센터가 제정한 상이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이 상을 수여했었다. 센터 책임자가 평양에 와서 당 창건 기념일을 앞둔 10월 9일에 김영남이 대리 수상 했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반제국주의적 정신을 잘 승계했다는 명목에서다. 김일성에게도 그의 사후, 2001년에 수여된 바 있다. 핵무기가 평화와 연결되고 평화는 반제국주의(반미)와 연결된다. 즉, 김정은이 핵무력을 통해 미국의 위협을 막아내고 있다는 의미이다. 핵무기를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북한이 말하는 ‘평화수호’가 과연 북한정권(체제)유지를 의미하는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8년 신년사를 기점으로 김정은이 평화공세 전략으로 대외정책을 전환하면서 평화는 체제유지 차원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평화에 적화통일을 대입시키면 불온한 자로 평화를 깨트리는 자로 낙인찍히는 시절이었다. 김정은의 핵보유 의지가 체제유지 차원이라는 인식이 전문가 집단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했었다. 북핵 협상에서 스몰딜(small deal, 단계적 비핵화 + 제한적 대북제재) 방안도 이런 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김정은이 그의 정권만 유지되면 핵을 포기한다고 보는 경우이다. 북한의 고도의 연막전술에 넘어갔던 것이다. 현재는 남북 간의 대화 차단, 관계 악화와 북미 2차 정상회담(2019.2)의 불발로 김정은의 핵 포기 가능성을 점치는 이들은 매우 극소수가 되었다. 김정은의 핵 포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김정은의 평화공세, 핵 무력 완료 이후
2015년, 핵무기를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라고 부르고, 국제평화 인권상을 수여한 김정은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지도자상은 바로 ‘평화의 수호자’였다. 그런데, 그다음 해인 2016년 신년 초(1.6)에 김정은은 4차 핵실험을 감행한다. 당시 북한의 경제지표를 보면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결의 2270호)으로 북한은 경제성장률이 3.9에서 –3.5로 곤두박질친다. 그런데도, 같은 해에 5차 핵실험을 감행(9.9)하였고 유엔안보리는 다시 제재 결의안(2321호)을 채택하여 북한의 숨통을 조였다.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북한은 2016년에만 20여 차례나 미사일(중장거리) 도발을 했다. 2017년에도 10여 차례 미사일 도발을 하던 북한은 급기야 11월에 화성-15형(ICBM급, 미국본토진입)을 발사하였고 <핵무기 완성단계시기>라고 선언하였다. 핵실험을 완료하고 투발 수단인 미사일 능력도 갖추고 나서야 김정은이 평화공세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2018년 평화공세 전략으로 전환하면서 그해 4월, 당 전원회의를 개최한 김정은은 2013년에 제시했던 ‘핵-경제병진노선’을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를 보면, 핵 폐기가 아니라 핵 동결임을 충분히 짐작 수 있다. 결정서에서는 ‘핵무기 병기화’를 선언한 것이다. 지하핵실험,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 초대형무기와 운반(투발)수단인 미사일 기술을 완료했다고 천명했다(결정서 1조항). 한편으로는 핵 위협이나 핵 도발이 없는 한 절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핵물질이나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했다(결정서 4조항). 따라서, 이 결정서는 경제건설 집중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강력한 핵무력 국가가 되었다는 선언서였던 것이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에만 주목한 나머지,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탑-다운 방식의 극적 타결을 기대했었다.
백두산 대국, 사회주의의 보루(堡壘)
이제 본격적으로 백두산 대국의 그 종착지를 확인해 보자. 2017년 11월, 화성 15형을 발사하기 3개월 전에 백두산 정상에서 ‘백두산위인칭송국제축전’(백두산태양맞모임)이 열렸다. 일본, 나이지리아, 러시아, 덴마크 등 북한친선협의회 위원장들과 각국 관계자들이 모여 <백두산 선언>을 공포했다. 이 선언을 기점으로 김정은은 김정숙(김정일 생모)을 제치고 백두산 3대 장군(위인)으로 등극했다. 선언문에서 김정은을 ‘또 한분의 위인’으로 칭했고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을 ‘21세기의 위대한 태양’으로 선언했다. 외부인들로부터의 지도자에 대한 추앙은 북한의 전통이다. 선언문 말미에 북한친선협회들의 맹세문을 담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우리들은 력사의 온갖 도전을 과감히 짓부시며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는 반제자주의 성세, 사회주의 보루인 백두산 대국을 지지 성원하는 활동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서 ‘자주의 길’은 김일성 시기를 가리킨다. ‘선군의 길’은 김정일 시기이다. ‘사회주의의 길’은 바로 김정은의 시기를 일컫는다. 백두산 대국을 사회주의 보루(堡壘)라고 명명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두산 대국을 사회주의의 완성으로 설정했다. 사회주의 완성이 반제국주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북한친선협의회 맹세문이 왠지 우리 사회안에서도 조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2018년 11월, 대학생진보연대(대진연)에서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기대하면서 ‘위인맞이 환영단’을 결성했다. 위인 맞이 앞에 백두산이 생략된 것은 아닐까. 이후, 그들의 행보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국제북한친선협의회’처럼 반미의 기치를 강력히 내세우면서 미 대사관 관저를 무단 침입(2019.10.18.)하여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단지, 김정은을 북한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차원에서인가. 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백두산 대국’으로의 진입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사회주의의 완성은 ‘남조선 해방’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한창 진행되던 2018년에는 북한 비핵화의 현실 가능성을 점쳤던 이들이 상당수였다. 현재는 북한 비핵화는 물 건너갔다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비핵화 가능성에 목소리를 크게 내었던 이들이 여전히 방송사 마이크를 잡고 있다. 핵무기가 북한체제유지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평화를 남북한 두 체제가 현 상태로 잘 유지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과연 북한이 말하는 평화가 그런 걸까. 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2020년 들어서 북한이 그 가면을 벗어 던져 버렸다.
2020년 6월 26일자 노동신문 사설에는 “정전은 평화가 아니다. 이 땅에 제국주의와 계급적 원쑤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해이될 수 없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제국주의만 언급했다면 종전선언 이후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 철수까지라고 봐줄 수 있다. 하지만 ‘계급적 원쑤들’은 바로 남한 내 혁명적 타도세력(친미사대주의, 보수주의자들)을 뜻한다. 사설에서 말하는 평화는 남조선 해방을 가리키고 있다. 북한은 이미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 2018년 1월호에 김정은식 평화인 남조선 해방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당 선전선동부 산하기관인 작가동맹은 당의 지시를 철저히 관철한다. 그들이 쓰는 글들을 당의 지침으로 이해해도 틀림이 없다. 몇 달 전 김여정이 작가동맹에게 김정은이 제시한 ‘백두산 대학의 정신’을 담은 문학작품을 만들라고 지시를 했었다. 이런 측면에서, 김정은이 대외적으로 평화공세를 시작하던 때, 당은 작가동맹을 통해 평화는 곧 남조선 해방이라고 인민들에게 철저히 주입시킨 것이다. 행여나 김정은식 평화를 잘못 받아들이지 말라는 단도리이다.
<조선문학>에 실린 ‘성전의 나팔소리’(단편소설)는 김정은을 평화의 수호자로 묘사한다. 김정은을 사랑과 믿음의 전쟁 철학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위대한 대성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인 사랑과 믿음을 끔찍한 전쟁에 대입시켰다. 소설 내용을 보면 사랑의 대상은 미제국주의 압제하에 놓여있는 남한주민들이다. 전쟁을 감수하면서라도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작가동맹의 또 하나의 기관지인 <청년문학> 2019년 1월호에 실린 혁명송가 ‘김정은 장군 찬가’에서도 김정은이 “백두산 대국 삼천리 밝은 미래 펼친다”라고 하면서 분명하게 백두산 대국의 종착지를 설정하고 있다. 삼천리는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김정은이 2020년을 ‘정면돌파의 해’로 내세운 가운데 북한의 대표적 구호는 ‘백두산 대학’, ‘백두 칼바람 정신’이다. 작년 12월 초, 김정은이 백두산 정상에서 ‘백두산 대학’을 제시한 이후 현재까지 노동신문은 ‘백두산 대학’에 대한 기사를 61건을 실었으며 ‘백두산 정신’은 121건이나 된다. “백두에 칼바람 맛을 알면 혁명가가 되고, 모르면 배신자가 된다.”라는 문장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노동신문 6월 8일자에는 “눈보라치는 백두산에 올라 백두의 칼바람을 맛보아야 백두산의 진짜맛을 알수 있으며 조선혁명을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지게 된다.”고 했다. 백두산 대학(백두산혁명전적지답사행군)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의 숭고한 뜻이고 의지이다”라고 명확히 적시했다.
김정은의 지시로 작년 겨울부터 북한 인민들은 총동원되어 백두산을 오르고 있다. 조선소년단 400만 명, 김일성-김정일 청년동맹원 800만 명을 포함한 모든 각계각층의 인민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남조선 혁명’에 대한 굳은 결의를 다지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우리사회안에 강력하게 평화를 내세우는 이들이 단지 북한의 가짜평화 공세에 휘둘려 동조하는 차원인지, 아니면 북한과 같은 종착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만일, 후자라면 대한민국은 매우 심각한 위기국면에 직면해 있다.
*이글은 WORLD VIEW 8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