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인공지능 로봇’, 인간의 조력자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반영하고 대신할 정도의 새로운 존재가 등장했다. 일명 ‘로봇’이다,
로봇의 영역이 무한정으로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을 내재한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을 이긴 이후, ‘인간의 조력자인가, 인간을 대체하는가’라는 문제가 현대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특히 코로나19 이후 접촉이나 대면을 꺼리는 비대면 시대에 로봇과 인공지능(AI)의 결합은 그 역할이 더 커지고 있다.
‘로봇’이라면 흔히 궂은 일을 도와주는 심부름꾼의 이미지나, 대화를 나누며 말동무가 되어주는 친구 같은 이미지를 연상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T-600과 같이 인류를 공격하는 침략자의 이미지 등을 가지고 있다.
1920년 카렐 차펙의 희곡인 ‘로섬의 만능 로봇 R.U.R.’에서 처음 등장했다. ‘로봇’이란 단어가 탄생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오락적 존재나 살아있는 금속 인형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희곡이 나온 뒤에 로봇은 금속 인형을 넘어 사회에 귀속된 기계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962년 미국의 유니 메이션사가 최초의 산업용 로봇인 유니 메트를 생산해 제너럴모터스의 자동차 부품공장에 설치하며 로봇 산업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일본의 가와사키 사나 스웨덴의 아베베사 등이 로봇 시장에 뛰어들며 로봇산업의 규모는 커져갔다. 커져가는 규모와 더불어 기술의 수준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발전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럼 현재 로봇 산업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태어나는 기계의 발전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
현재의 로봇 기술은 상상 이상의 매우 높은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따라서 몇십 년 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일들을 현재의 로봇들은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예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수술 로봇’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손이 정교하다고 하지만 그날의 컨디션이나 긴장 정도에 따라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기술은 매우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로봇은 프로그램에 입력받은 값만큼 정확히 움직이므로, 정교성이 매우 뛰어나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 수술 로봇이 개발됐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술로봇인 ‘다빈치’는 오차 범위 0.1밀리미터 이내로 수술 부위를 절개하기 때문에 수술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재활 로봇’도 등장했다. 재활 로봇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재활 로봇은 전쟁에 의해 발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수많은 장애인들로 인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후 장비의 수요 덕분에 충분한 연구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현재 인공지능이 내장되어 있는 로봇 의족과 생각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전자 휠체어 등이 개발되었다.
인간과 로봇, 공생할 수 있을까? 로봇을 통하면 1초만에 자동 결제가 된다. 이처럼 현재 로봇은 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일들을 수행하며 인간을 도와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로봇이 인간의 자리나 존엄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일자리 문제가 그 대표 사례 중 하나이다. 현재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면 인간은 모든 일자리를 뺏길 것이라는 게 문제의 주요 쟁점이다.
이러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술의 진보를 늦춘다고 말하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현재로써는 어느 누구의 말이 맞다하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로봇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은 격렬한 토론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인간을 위해 만든 기술이 인간을 위한 것인지 합의가 필요하다. 문명의 진보는 인간이 저절로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득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 있다.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로 어떻게 드러날까. 사실 로봇이란 기술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도 수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특히 ‘인공지능(AI)’은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일부를 인공적으로 구현하며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지능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가정 하에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아니 인간보다 더 똑똑한 존재에 대한 관심이 바로 '인공지능(AI)'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20년쯤 지나면 인공지능(AI)이 한층 발전해 ‘로보 사피엔스((Robo Sapiens, 로봇+AI)’를 이룰 것이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류)를 기능적으로 뛰어넘을 것이고,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할 것 같다.
이에 최근 인공지능(AI) 로봇과 인간복제에 관해 격렬한 논쟁들이 오가고 있다. 어쩌면 정말 가까운 미래, 다음 버전의 차세대에는 우리가 찾지 못했던 새로운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의 세계와 우주의 진화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만약 AI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롭고 황당스러운 답을 던져준다면, 과연 그것을 웃어넘길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절대 찾을 수 없었던 가장 최적의 한 수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인공지능이 정말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이 새로운 다음 시대의 과학 혁명을 야기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프로그램이 새롭게 그려낸 과학적 패러다임 속을 살아가는 첫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그러한 미래를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된지라(창 2:7)”라고 설명한다. ‘생령’이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living being- 표준새번역성경,우리말성경) 또는 산 영혼(living soul-kjv, 흠정역성경)을 말한다.
‘살아있는 영혼’이란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기능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로봇이 소유할 수 없고 로봇과 달리 구별되어진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영역이 있음을 보여준다.
알파고는 처음부터 바둑판 너머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이 엄청난 로봇의 존재에 미래를 맡길 수 있느냐, 영혼이 없는 쇠덩어리로만 볼 것인가.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조력자인가, 아니면 인간을 뛰어넘는 대체품인가. ‘로봇’이라는 기계가 못하는 것, 인간만이 가진 본래의 저력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 자체가 대안이 아닐까.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