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기도는 구걸이고, 구원은 구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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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구제의 대상인가, 긍휼의 대상인가?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인간의 ‘생존과 필요’는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돼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제로 그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여 살도록 했다. 인간이 독립적, 자립적이 되려는 것은 분수를 망각한 교만이다.

그럼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의 자비를 입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말만 그의 자비를 의지한다는 것이지, 사실 대가를 지불하여 그것을 사려는 변종(變種) 공로주의(功勞主義)이다. 자비란 아무 공로, 의가 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의 자비를 구걸하며 산다’는 말인가? 이는 인간을 ‘빌어먹는 비참한 거지’로 전락시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인간을 빌어먹고 살도록 하실 리 없다. 설사 그 대상이 하나님일지라도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무조건 자신을 낮춘다고 해서, 겸손이 아니다. 하나님이 낮추라는 만큼만 낮아져야 한다. 지나친 낮춤은 그를 창조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인간의 ‘생존과 필요’가 분명 하나님께 의존돼 있지만(행 17:28), ‘걸인(乞人)같이 하나님의 동정을 받아 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사랑)’을 받아 살라는 뜻이다. ‘걸인(乞人)으로 동정을 받는 것’과 ‘애인(愛人)으로 긍휼을 입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인간을 비참한 ‘동정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귀함이 부정된 ‘인간 비하’이다.

인간이 비록 죄로 타락됐지만 여전히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잔존할뿐더러, 그리스도가 그의 대속물이 되어줄 만큼 고귀한 존재이다.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전자가 ‘중세적 인간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후자는 ‘종교개혁주의적 인간관’에 영향을 받았다.

종교개혁주의는 인간이 피조물이요, 절망적인 죄인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을 만큼 존귀한 존재라는 균형 잡힌 인식을 견지한다.

◈구원은 구제인가?

두 입장은 ‘구원관’에 있어서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전자에 따르면, ‘구원’은 단지 죄로 멸망당할 ‘가련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제(aid, 救濟) 혹은 동정’일 뿐이다. 이는 주로 ‘만인구원론(universalism, 萬人救援論)’이 취하는 입장이다.

여기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된 경륜이나 계획이 수립돼 있지 않다. 그들의 구원은 ‘인간의 비참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즉흥적인 동정심’,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갈망’에 의존된다. 따라서 그것의 성격이 극히 ‘비일관적’이고 ‘우연적’이다.

후자에 따르면, 그들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작정과 부르심’에 의존되며,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을(롬 8:29; 11:2) 향한 ‘부성애적 긍휼’이다. 따라서 이들의 구원관에는 ‘관계성’, 필연성’, ‘일관성(연속성)’이 담보된다.

성경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동기’를 단순한 ‘동정(sympathy)’이 아닌 ‘긍휼(compassion, 矜恤)’로 말하는 것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성, 필연성, 일관성’에 기반한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동정(sympathy)’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나타내는 감정이다.)

‘동정(sympathy)’이 ‘관계불문성, 즉흥성, 우연성’에서 나오는 인간 ‘심연(深淵)의 감정’이라면, ‘긍휼’은 ‘부자(夫子), 부부(夫婦), 친구’간에 발생되는 ‘관계적이고 필연적인 감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기원을 갖는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엡 1:4-6)”.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란 것도 흔히 생각하듯,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동정’을 받아내려는 ‘대쉬(dash)’가 아니다. 창세전에 연원(連原)한 ‘하나님의 긍휼(구원에의 부르심)의 수납’, 곧 ‘그리스도 영접’이다.

◈기도는 구걸인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마 7:7)”,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이 내용들은 ‘강청(强請)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로서,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께 애걸복걸하여 소원성취를 이룬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우상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무속인’, 부처 앞에 3천배를 올리는 ‘불교인’, 구걸하여 얻어먹는 ‘걸인’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과연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하나님 자녀 됨의 품위’도 결여된, 오직 ‘욕망’에 매몰된 ‘비인격적인 무속 행위’일 뿐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응답)의 핵심 사안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성’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 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녀 된 성도는 성부 하나님께 구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도 ‘기도’를 ‘자녀가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기도의 대표 구절’로 통하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는 말씀 역시, 기도를 ‘자녀 된 성도가 성부 하나님께 간청하여 얻는 것’으로 정의했다.

물론 성경도 ‘간절함’이 기도의 ‘중요 요소’이며,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까지 말한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그러나 이 내용은 기도에 있어 ‘관계’는 무시돼도 좋고, ‘강청(强請)’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강청’도 벗됨의 ‘관계’에 기반 했다. 그는 ‘벗됨’에만 안주하지 않고 ‘벗됨’을 기반한 ‘강청’으로 친구를 감동시켰다.

만일 ‘강청자(强請者)’가 ‘벗’이 아니었다면, 그 강청도 무용지물이다. ‘벗됨’이 ‘강청’을, ‘강청’이 ‘벗됨’을 돋보여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엔 무심한 채 ‘강청’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애걸복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강청’은 ‘관계’와 더불은 것이지 ‘관계’는 무시된 ‘강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도의 ‘관계성’과 ‘강청’을 다 포함하고 있는 구절이 “‘그 밤낮 부르짖는(강청)’, ‘택하신 자들(관계)’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이다.

기도가 ‘구걸과 동정’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요 14:13).”

‘구걸’로 받는 ‘동정’은 보장이 없다. 동정하는 자의 능력, 그리고 당시 그의 기분에 따라 걸인에게 동정을 베풀 수도 있고 안 베풀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런 불확실한 동정을 바라는 걸인은 구걸하면서도 언제나 불안과 조바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성도의 간구’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런 불안 없이 안정감 있게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안정감은 ‘기도자의 품격’을 높인다. 그가 설사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한 때에도, 의심이나 자괴감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얻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그의 뜻을 분별하며 인내심 있게 기도한다(요일 5:14-15).

마지막으로, 성도의 기도가 ‘걸인의 구걸’이나 ‘우상에게 비는 이방인’의 천박한 기도 같은 것으로 전락시킬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이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약속(요 14:13)”됐을 뿐더러,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시는(롬 8:26)” 삼위일체적 경륜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의 경륜을 알 때, 우리는 그것을 다만 ‘사람의 일’로 혹은, ‘인간 욕망의 발현’으로 만들 수 없다.

기도뿐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도 ‘구원’도 ‘필연성’과 ‘일관성(연속성) 속에서 성취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신적 경륜(Divine statecraft)’이니, ‘경외스런 믿음(awesome belief)’으로 그것들을 받게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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