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서울 동자동 작은 자 교회
일시: 2020년 9월 13일
본문: 마태복음 25장 40절
제가 석 달 전인 2020년 6월 14일 주일 동자동 작은 자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교회 근처에 있는 쪽방들을 방문하면서 가난과 고난과 질병을 몸에 지니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쪽방 사람들과 노숙인들이 교회 근처에 너무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화성 목사님과 작은 자 교회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최화성 목사님이 저보고 몇 달 후에 다시 와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무슨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제가 원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가자 마자 최화성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고 9월 13일 주일에 다시 와서 설교할 수 있겠다고 하면서 마태복음 25장 40절을 본문으로 삼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최화성 목사님이 조금 놀라는 듯 하면서 자기가 7년 전 교회를 설립할 때 마태복음 25장 40절을 생각하면서 교회 이름을 ‘작은 자 교회’라고 정했다는 말을 하면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제가 설교 제목을 잘 정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는 제목으로 파주 오산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고, 대구 푸른 숲 교회에 가서도 설교를 했고, 일본 오끼나와 아이노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한 설교들을 참고하면서 조금씩 수정 보완해서 오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는 제목의 설교 시작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우리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시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돈도 많고 지식도 많고 능력도 많은 큰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죄인들보다는 소위 의인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성부 하나님께서는 물론, 성자 예수님께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하고 보잘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었습니다.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고 또 펴시었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가치 없고 쓸모 없는 천대 받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멸시와 정죄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강도 만나 옷을 벗기고 매를 맞아 쓰러져서 죽어가던 사람,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같은 부도덕한 사람,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 들렸던 인간 쓰레기,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저주 받은 사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로마 군인들과 같은 포악한 죄인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와 같은 소망 없던 죄인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아니 초기의 수제자 베드로의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도저히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없는 버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했고 초기의 베드로는 칼을 뽑아서 찌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너무 이상하게도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 모두에게 멸시와 분노와 정죄의 얼굴 빛을 나타내 보이시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눈빛을 나타내 보이셨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며 저들을 모두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러면 이제부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나타내 보이신, 멸시와 천대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 하나 하나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들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강도 만나 옷을 벗기고 매를 맞아 쓰러져서 죽어가던 불행한 한 사람에게
첫째로, 강도 만나 옷을 벗기고 매를 맞아 쓰러져서 죽어가던 불행한 한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편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세밀하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너무 귀중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당시 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별 가치가 없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길 가다가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한 사람이 그렇게 귀중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뉴욕 거리에서도 한국의 어느 지하철 모퉁이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에게는 아주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건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그런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1-32)”.
그런데 그 당시 멸시를 받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서 죽어가던 지극히 보잘것없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다는 이야기를 성자 예수님께서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3-35)”.
그리고 그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시면서 유대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성자 예수님께서 귀중하게 보신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제사 의식도 아니었고 율법사의 올바른 율법 해석도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펴는 것과 꼭 같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 사마이라 수가성 여인에게
둘째로, 사마이라 수가성 여인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 다섯과 또 한 사람을 두었던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그런 여인을 만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사람들 만나기를 피하면서 사람들이 물 길러 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로 왔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 바로 그 시간에 맞추어 수가성 우물로 가셨습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가시지 않고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목이 마르시고 피곤하신 모습을 지니시고 가셨습니다. 보잘것 없는 가치 없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인은 성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거부감까지 나타내 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라고 말하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께서는 참고 인내하시면서 그 여인의 부정적이고 거부적인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성자 예수님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 여인의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난 다음,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 주님을 증거까지 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에게
셋째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 쓰레기였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 말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문자적으로 일곱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와 동일시합니다.
셋째 해석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설교자 맥클라렌이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죄악은 단테가 기술했던 일곱 가지 죄악인데, 교만, 시기, 분노, 음란, 탐욕, 무절제, 영적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였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판단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안락사시켜야 마땅한 인간 폐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귀신의 쇠사슬에서 건져내셨고, 윤락의 늪에서 건져내셨고, 죄악의 덫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부탁하신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낄 수도 없는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 쓰레기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4.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여자에게
넷째로,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여자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 현장에서 잡힌 남자와 여자는 둘 다 돌에 쳐서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서 돌로 치기 전에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성자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결국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모두 그 자리에서 떠났고 성자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성자 예수님께서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그 여자는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 때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그 여자는 살아났습니다. 몸만 살아난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도 영혼도 살아났습니다.
아마 그 여자도 막달라 마리아와 비슷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생 울면서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수많은 죄인들에게 전하고 또 전하는 성자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낄 수도 없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인간 폐인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셨습니다. 간음한 죄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소위 의인들보다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신 너무너무 이상한 분이셨습니다.
5.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던 로마 군인들에게
다섯째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던 로마 군인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총독 군인들이 성자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고 희롱하면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마 27:28-35)”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던 포악한 로마 군인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나타내 보이시는 대신 다음과 같은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 올려 드리셨습니다.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것은 베드로는 물론 하늘의 천사들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모순되는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순되게 보이는 기도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로마 군인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성자 예수님의 사죄의 기도 소리와 강도 한 사람에게 하시는 축복이 말씀을 듣고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바라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고백을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가장 악독한 로마 군인들에게, 지옥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어떻게 이런 놀라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진리의 칼을 휘두르셨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사실 진리의 칼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낄 수도 없는 ‘저주 받아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마귀새끼 같은 죄인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의 칼은 사람들을 죽이고, 은혜의 손길은 사람들을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6.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한 강도에게
여섯째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한 강도에게 나타내 보이신 성자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겠습니다.
강도는 이스라엘 국법에 의해서도 처형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고, 이스라엘의 종교법에 의해서도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고, 신약의 가르침에 의해서도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한 강도는 평생 죄만 짓던 범죄자였습니다. 회개한 일도 없었고, 예수님을 믿은 일도 없었고, 교회를 다닌 일도 없었고, 세례를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소망 없는 범죄자였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다른 강도는 세상을 원망하고 그리고 자기 옆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그런데 한 강도는 원망하며 비방하는 자기 동료 강도를 바라보면서 원망도 분노도 증오도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한 강도는 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결국 한 강도의 생각과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강도는 성자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 강도를 꾸짖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눅 23:40-41)”.
그리고 한 강도는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한 강도는 흐느끼면서 호소했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유창한 설교였습니까? 진리의 칼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묘사한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서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입도 열지 않고 잠잠한 모습을 지녔고 그리고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우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포악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이 한 강도의 마음과 생각과 몸과 영혼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호소에 대한 성자 예수님의 응답은 너무너무 놀라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아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낄 수도 없는 ‘저주 받아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마귀새끼 같은 죄인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의인들에게 펴시는 것보다는 죄인들에게 더 많이 펴시는 성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는 가슴에 눈물을 지니고 울면서 나도 의인보다는 죄인이 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가슴에 지니곤 합니다.
7.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일곱째로, 성자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는 것이 곧 성자 예수님 자신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는 것과 꼭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사람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려고 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34-46)”.
그 다음, 성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산 사람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골라 간단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성 프란치스코
첫째로, 성 프랜시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지극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셨습니다.
버림 받은 나환자들을 찾아가서 나환자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바치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버림 받은 무슬림들을 찾아가서 무슬림들에게도 심지어는 이단들을 찾아가서 이단들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사나운 이리에게도 참새들에게도 그리고 모든 생물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면서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2) 손양원 목사
둘째로, 손양원 목사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지극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은 지극히 작은 자들인 나환자들에게 나타났고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해서 죽인 공산당 살인자에게까지 나타났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셨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했습니다. 두 아들이 총살당해서 죽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셨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결국 손양원 목사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낄 수도 없는 ‘저주 받아 지옥 불에 떨어져야 마땅한 마귀새끼 같은 살인자’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결국 안재선을 살렸고 가지의 양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3)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
셋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지극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셨습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에 가서 13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셨는데, 그 사역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보잘것없는 가난하고 병든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모든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아침에는 항상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셨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 누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셨습니다.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하셨습니다. 누가 아기를 낳으면 달려가서 아기를 받아주고 그 집에 있으면서 산모와 아기를 돌보아주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떤 때는 귀신 들려 미치광이가 된 폐인을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이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4) 한경직 목사
넷째로, 한경직 목사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지극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사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셨습니다.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드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45년 10월 월남 후 서울 저동에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대전에서는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들 하나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시면서 사신 예수님 닮은 목사님이셨습니다.
5) 장기려 박사
다섯째로, 장기려 박사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 하나에게’ 지극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사셨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한국 언론들은 그 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먼저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사시면서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셨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셨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 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지고 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크고 화려한 사역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성공하는데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적인 교회 성장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가치 없는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불쌍한 사람들에게, 아무 가치 없고 쓸모 없는 천대 받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정죄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도 만나 옷을 벗기고 매를 맞아 쓸어져서 죽어가던 사람에게,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같은 부도덕한 사람에게,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 들렸던 인간 쓰레기 같은 사람에게,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더러운 여자와 같은 사람에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던 로마 군인들과 같은 저주 받을 사람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강도와 같은 소망 없는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자동 작은 자 교회 촤화성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여러분들 모두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사시는 아주 귀중하고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읽으므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