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기산 김준근 화백이 ‘천로역정’ 삽화를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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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칼럼] K컬쳐 원조 기산(箕山), 《천로역정》에 흠뻑 빠지다

▲기산 김준근이 삽화를 그린 <텬로역뎡>의 기독도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최초의 갓 쓴 예수님.

▲기산 김준근이 삽화를 그린 <텬로역뎡>의 기독도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최초의 갓 쓴 예수님.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로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 정상을 2주 연속 지키며, K팝 아이돌로 한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이런 한류 문화의 원조는 누구일까. K(Korea)-컬처(culture) 원조는 당연히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화백이다.

김홍도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풍속화는 18세기 정조 때 전성기를 누리다, 그의 사후 쇠락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엽 개항 이후 서양인 선교사들이 찾으면서 다시 인기를 누렸고, 해외 수출 1호작이 나왔다.

이런 K-컬처, ‘원조’ 한류 풍속화의 중심에 기산(箕山)이 있다. 정확한 생몰연대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한말에 활약한 기산 선생은 명실상부한 한국인 최초 국제 화가라 할 수 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다양한 그림을 통해 당시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세계 만방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기산 선생의 그림이 국내보다는 독일이나 프랑스, 덴마크, 캐나다 등 해외에 더 많이 남아있는 것도 그의 국제성을 웅변하는 하나의 증거다. 특히 2천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준근 붐’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기산 그림의 품귀현상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기간에 기산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그리고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약 한국 3대 풍속화가 대열에 당당히 입성했다.

기산 선생은 국내 최초 출판된《텬료력뎡》의 삽화를 그려냈다. 원전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은 영국의 청교도 작가 존 번연(1628-1688)의 소설로, 1678년 초판이 나왔다.

꿈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 책으로, ‘기독도’라는 남자가 ‘멸망할 도시(장망성)’를 떠나 ‘시온성(천성)’을 향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크리스천이 인생의 여정에서 욕망과 싸우며 사탄의 도전 앞에서 거룩함을 이뤄간다는 이야기로,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국내에서 1895년 첫 출판된 《텬료력뎡》은 장로교 제임스 스카스 게일(한국명 기일·1863-1937) 선교사와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했다. 그들은 한국 문화의 진수를 간파해 이를 서양에 소개하고, 토착적 기독교를 한국에 심어주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였다.

이 책을 읽으며 책에 흠뻑 빠진 기산은 총 42장의 삽화를 그렸는데, 당대 풍속화가 기산 풍속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책에서 보여주는 ‘기독도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는 세계 최초의 갓 쓴 예수님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장면은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 토착적인 전통을 반영한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단원이 삽화를 그린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함께 한국의 3대 미서(美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텬료력뎡》초판본은 상·하 2권으로 나눠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미려한 한지를 사용하여 한 장 제본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한글로 번역된 《텬료력뎡》은 장대현교회 길선주(1869-1935) 목사가 읽고 감명을 받음으로써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신촌성결교회를 세운 이성봉(1900-1965) 목사도 전국을 다니며 ‘천로역정 부흥회’를 개최할 정도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다. 이 목사는 ‘멸망의 도시’를 장차 망할 성이란 의미의 ‘장망성’으로 표현했다.

한말 당시 기산 그림의 첫 주문자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 에드워드 마이어(1841-1926)로, 조선 정부로부터 독일 주재 조선국 총영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1884년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냈던 독일인 파울 게오르크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제물포에 한국 첫 독일회사인 세창양행을 설립했던 사업가였다. 마이어는 이 그림을 포함해 기산에게 주문한 조선의 풍속화 61점을 고향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현 MARKK)에 보냈다.

최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김준근 풍속화 총 79점이 최근 코로나19를 뚫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것을 접한다는 것은 미술애호가 만이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0월 5일까지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는 특별전을 열어 대중을 만나고 있다. 기산 특별전을 통해 세계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이자 한국기독교 신앙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텬료력뎡》과 기독교 문화 개척에 일생을 바친 게일 선교사와 김준근 화백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기산 선생의 작품 중 《천로역정》은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로, 국문학사적으로도 당시 한글 보급과 문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최초로 번역된 《텬료력뎡》초판본은 현대식 인쇄출판을 통해 초기 대중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한국의 기독교 신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문화재 685호에 등재된 《텬료력뎡》초판본은 한국 기독교 복음전파와 책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희귀본으로, 철저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

《텬료력뎡》출판 당시는 기독교 신앙이 한국에 상륙했을 초기였다. 19세기 한국은 열강들의 간섭에 국기가 흔들리고 부패와 혼란이 극도에 달하여 생활이 참 어려웠던 때다.

그러한 시대에 오늘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고 구원의 길을 걸어가, 내세의 행복을 접하게 되는 ‘천로역정’ 이야기가 이 땅에 소개된 것이다.

천성을 바라보며 일제의 기독교 신앙 탄압에 대항하여 순교로 맞선 신앙인들의 꿈은 ‘천로역정’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가?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오늘날, ‘천로역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기산 김준근이 삽화를 그린 '천로역정'에 대해 설명하는 이효상 원장.

▲기산 김준근이 삽화를 그린 '천로역정'에 대해 설명하는 이효상 원장.

이효상 원장(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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