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마테오 리치와 존 로스 선교사
한자와 한글 등 복음 전하는 방식 달랐지만
같은 시대 중국과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해
영혼 구원 열정과 사랑의 수고, 오늘날까지
아시아권, 특히 선교지 중국과 조선에 복음을 전한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두 선교사가 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이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마테오 리치(중국명 利瑪竇) 선교사는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도시 마체라타에서 출생했다. 그의 이름 중 ‘마테오(Matteo)’는 세례명이다.
부친인 요한 리치는 마체라타의 시장을 지냈으며, 후에 주지사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마테오 리치는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로부터 배웠으며, 가정교사인 니콜로 벤치베니는 후에 개혁적인 예수회에 입회하여 리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1571년(19세) 예수회에 입회하여, 로마의 예수회 수련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선교사로 1582년(30세) 중국의 마카오에 도착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 온 이탈리아인으로 선교를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사제급인 승려와 같은 격으로 어필하기 위해 삭발하고 승복을 착용하고 전도생활을 시작할 정도였다.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까지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여 유교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유학자들의 한계를 찾아내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에 대해 자신과의 대화 형식을 빌어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극희귀한 기독교 서적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8편 174항목으로 되어 있고, 1603년『천주실의(天主實義)』를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했다.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1868년 거듭 출판됐다.
마테오 리치 선교사는 중국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동양 사회에 대한 기독교 전파가 목적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했고, 중국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의 명저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을 살펴보면, 1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기독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적 성격에 대한 설명,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동물·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천국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기독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 생활과 기독교에 귀의해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서교(西敎)’,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중국 지식인들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들이 서학, 즉 기독교(천주교)를 수용 신앙 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기독교(천주교), 즉 서학이 유교와 불교 사상이 굳건한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인조 때다. 숙종 때는 교세를 자못 떨쳤으며, 영·정조 때는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처에 성행했다.
특히 영조 시대에는 전성기를 맞아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한 서학 연구는 그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돼 ‘조선 서학’이란 학문체계가 수립됐고, 조선 후기 실학 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 불안 속에서 서학 사상은 지식층에게 새로운 개혁 의식의 확대와 봉건 사회에 대한 개혁 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감당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로 『성호사설』을 저술한 이익(李瀷)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라며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천주실의(天主實義)』 내용은 1614년 선조 때 지봉(芝峰)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芝峰類設)』에 실리면서 조선 학자들에게 전해져 이익, 안정복, 다산 정약용, 이승훈으로 이어지는 신앙인들을 배출하며 초기 한국기독교의 사상적 기초를 놓았다.
1866년(고종 3년)부터 1871년(고종 8년)까지 이어진 한국 최대의 신앙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와 특히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자국의 문화를 자국 국민들이 있는 대로 부수고 불태워 없앤 전례 없는 대사건이다.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해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서적은 두 사건을 통해 전부 소실됐다. 그래서 박물관들도 이때의 영인 복사본을 간신히 구해 전시할 정도로 아주 희귀하다.
그런가 하면, 마테오 리치의 기초를 닦은 뒤 중국에 들어온 존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신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이다.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개시했고, 1871년부터는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존 로스 선교사는 1872년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됐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사역하며 심양의 동관교회를 설립했는데, 1873년 존 로스는 윌리암슨 선교사로부터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소식을 듣게 된다. 두 선배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동받은 로스는 중국에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존 로스 선교사가 한글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1877년 중국 선교지에서 저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한글 교재를 출판하면서 가로쓰기를 하게 됐고, 띄어쓰기도 함께 도입한 것이다.
책에서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 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 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라며 한글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최초 한글 띄어쓰기 후 1896년 서재필, 주시경,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등이 만든 간행물 <독립신문>이 한글 최초 띄어쓰기로 전해져, 오늘까지 그렇게 쓰여진다.
그는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린다. 마테오 리치 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기독교 교리를 한자로 출간하여 기독교 기초를 놓았다면, 존 로스 선교사는 라틴어나 독일어 성경을 평민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글의 발전 및 복음의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반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 함은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 1883년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데자행젹』과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1884년 『예수셩교셩셔 마태복음』과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1885년 『예수셩교셩셔 요한복음 어비쇼셔신』, 1887년『예수셩교젼셔』 등 총 8권의 한글 성경을 번역 간행했다.
한글날을 맞으며 두 선교사들을 생각함은, 한자와 한글이라는 도구, 지식인과 평민이라는 대상 등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동 시대를 살며 같은 땅, 같은 선교지에서 한 사람은 중국을, 또 한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했던 그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과 사랑의 수고는 오늘까지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근대문화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