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학자의 ‘기원에 관하여’
만물의 기원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본래 철학의 영역이었다. 철학은 기원전 6세기 경 만물의 근원에 관한 사유로부터 시작한 학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로 탈레스를 꼽았는데, 이는 탈레스가 최초로 만물의 근원에 대하여 질문하고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탈레스의 뒤를 이은 아낙시만드로스는 물·불·공기·흙에서, 아낙시메네스는 불에서 기원하였다고 했다. 이들 밀레토스 학파는 질료, 즉 물질로부터 만물이 기원하였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고대 유물론은 백년 후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으로 이어졌는데, 그는 만물은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원자의 이합집산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고대 원자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에 의해 밀려났다가, 근대 영국의 화학자 돌턴에 의해 재탄생해 오늘날 원자론의 근간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은 질료와 형상으로 이뤄지고,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목적에 따라 운동한다고 보았다. 그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인 답에 만족하지 않고, 물리학 너머(ta meta ta physica)인 형이상학 영역에서 모든 것(인과관계, 운동, 정도의 판단기준, 목적 등)의 제1원인으로 상정한 신에게 만물의 기원을 두었다.
이러한 자연철학적 우주론적 유신논증은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 신학에 도입돼 계시신학으로 덧입혀졌다.
근대 이후 기원에 관한 논의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출간 후 진화 생물학 내 다양한 형태의 진화론들이 주장돼 왔다.
최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을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 진화를 위한 기계로 보는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진화론과 첨단 과학 발전에 근거를 두고 유발 하라리는 과학 기술을 통한 ‘현대판 불로장생’을 누리는 호모데우스를 예견한다.
하지만 생물학과 지질학에서 진화론적 가설은 결코 증명된 적이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가설일 뿐이라는 말이다.
생명의 자연발생설과 더불어 종과 종 사이의 대진화의 가설을 뒷받침해 줄 중간 종의 화석(missing link)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과 생물의 기원을 넘어 물질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현대 물리학의 영역에서 주로 다뤄진다.
아인슈타인 이후 양자물리학은 원자 이하의 입자의 세계까지 그 탐구를 확장해 유령 같은 전자들의 행동양식을 발견하기에(양자얽힘현상) 이르렀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라고 부르는 힉스 입자를 201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강입자충돌기(LHC)를 통해 발견하기에 이른다.
또 현재 우주물리학에서 가장 유력한 기원 이론인 빅뱅 이론은 인플레이션 빅뱅 이론으로 수정된 후 2016년 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의 중력파 발견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검증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이론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21세기 첨단 과학인 이 두 영역 입자물리학 연구와 우주 물리학의 연구는 그 거대한 스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중첩되고 융합되고 있어 혁명적인 미래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판넨베르크 등 일련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빅뱅 이론은 그와 경쟁하는 다른 우주론인 정상 우주론보다 기독교 가르침에 더 잘 부합하는 이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설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의 그 어떤 이론도 항상 오류와 수정이 가능하며, 언제든지 또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바뀔 수 있다. 한 마디로 개연성 수준에서의 논의이다.
그러한 과학의 발전으로 오늘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각종 기술의 덕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놀랍고도 위대한 업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을 마주한 인류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겸허를 배워야 할 것이다.
기원에 관한 기독교 신학에서의 논의는 철학이나 과학에서의 논의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해 놓은 성경을 근거로 모든 것을 논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가설이나 이론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즉 신앙의 근거 위에서 논의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은 신앙의 대상에 대해 확실성(certainty)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나 의미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실로서 믿는 것이다.
신학도 학문이기 때문에 이성의 활동이며, 학문성의 기준에 합하여야 한다. 하지만 신학은 신과 그에 관한 계시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연역적·귀납적 방법 등 여러 논리적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권위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 특색이다.
한 마디로 성경의 권위에 입각하여 연구한다는 뜻이다. 신학 서론에 관한 논의는 매우 중대하고 많은 논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생략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영으로(시 33:6) 만물을 공허(無)로부터 창조하셨는데,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다(창 1장).
‘6일 창조’는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 중 제4계명의 근간이 되어 인간은 하나님을 따라 6일 동안 일하고 7일에 쉬어야 하는 유대교의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서 지키는 근거가 된다.
6일 창조의 ‘날(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그 하루를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24시간 하루로만 해석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애초에 이 하루가 얼마나 긴 하루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이다.
시공 자체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그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다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려니와, 하나님의 계시 초점은 창조 과정의 사실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하루와 인간의 하루에 대해, 인간의 하루를 기준으로 확정지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유비적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종류의 날 이론들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유비로서의 날 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오경 전체에서, 특별히 안식일 계명의 시각으로 볼 때 적합한 이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세기 1장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들’이라는 베른 포이쓰레스의 짧고 명쾌한 글은 다양한 이론들을 잘 제시하고 정당한 평가를 해주고 있다.
한편 창조에 대한 유신진화론적 이해도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애초에 진화론적 가설이 가지는 자연주의적이며 범신론적(자연 자체가 신적 위치에 있게 되는 의미에서)인 철학 자체가 신본주의적인 성경적 사고와 혼합되거나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주류 과학에서 폭넓게 전제되는 가설이지만, 그것이 이미 기원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자연과학의 범주를 넘어 신념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창세기 1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반복적으로 명시하고 있고,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만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직접 만드셨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창 2:7).
창세기 2장 4절부터 시작되는 톨레도트의 양식과 1장은 문학 장르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내용적으로는 조화롭게 이해해할 것이다. 차이가 있는 창조 순서도 1장은 세계 전체의 창조이고 2장은 개별적인 창조를 말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조화롭게 설명 가능하다.
김준 교수는 1장의 “각기 종류대로”의 종류를 생물학적 분류에 있어 ‘과(family)’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 했는데, 그의 <과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는 창세기에 대해 성도들이 가지는 많은 의문들을 과학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하는 유익한 책이라고 본다.
단지 식물, 동물, 사람의 창조를 삼분설적 이해인 육과 혼과 영의 창조로 해석한 것은 본문에 외적 의미를 부여한, 문제가 있는 해석이다. 또 성경의 인간론은 영육의 통일체로서 전인으로 보아야 하고, 동물의 혼과 인간의 혼은 서로 기원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전 3:21).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기원에 관한 가르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인격적 개입이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가시화하는 존엄한 존재로서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 보이는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는다(창 1:28).
창조 시 받은 이 문화명령으로 인해 인간은 비록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을 본 따서 그토록 찬란한 문화적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의 관점에서 본 신앙과 철학과 각 학문들의 관계
필자는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기독교 철학의 정립이 가장 시급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헤르만 도예베르트나 코르넬리우스 반틸 같은 사상가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고, 최근 제임스 K. 스미스 같은 소장 기독교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코르넬리우스 반틸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칼빈대학의 하워드 반틸과 전혀 다른 인물로서, 전제주의 변증학을 주장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더러 혼돈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요컨대 도예베르트의 기독교 철학의 시각으로 보자면 ‘창조과학’이나 ‘기원과학’이라는 용어는 학문 범주의 혼돈을 일으키는 적절치 못한 이름들임에 틀림없다.
창조과학이 창세기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해석을 고집하여 그 해석의 전제 위에서만 작동하는 하나의 논리적 이론(젊은 지구론)을 만들어 그것을 검증하는 학문으로만 자기 주장을 한다면, 그 토대가 위태롭기 때문에 지적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보다 폭넓게 창조신앙에 대한 과학적 변증이란 작업을 감당하는 기독교 과학자들의 연대로서 외연을 넓히고 다른 창조신학 연구회들과 동역하며 교류하며 나아간다면, 더 많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창조신앙에 대한 과학적 변증은 기독교 신앙의 변증 실천 차원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고, 특별히 잘못된 진화론의 폐해를 드러내고 증거적으로 논박하는 작업은 기독교 과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로서 교회와 신앙을 위해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학과 과학 사이의 보다 창조적이고 풍성한 논의와 소통이 있기를 소망한다.
기독교 철학에 의하면, 모든 학문의 근거에는 종교적 전제가 있다. 학문 활동은 공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적 사고의 가장 근원에는 종교적 근본 동기가 있으며 여기에는 두 가지 근본동기밖에 없다. 하나는 언약 순종자의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 파기자의 동기이다.
이 둘은 반립(antithetical)적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학문의 전제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연구에 있어 중생(palingenesis)의 선결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영역에서의 차이는 철학에서의 차이를 유발하는데, 철학은 크게 존재론·인식론·윤리학 등 세상을 전체로서 바라보며 삶의 체계로서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관의 차이 혹은 전제의 차이들을 다룬다.
철학적 근거에서 다양한 방법론들이 나오며, 각 전문 과학들의 각각의 방법론들은 모두 각 과학 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많은 학문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연구이다. 비록 현재 학문계가 세속적 인본주의의 자연주의 철학의 전제 하에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학문 활동을 하지만, 그들의 연구 대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 피조 세계에 담아 놓으신 원리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도예베르트는 성경의 창조론을 근거로 하여 일찍이 우주법 철학(philosophy of cosmonomic idea)을 발전시켰고, 피조 세계의 다양한 법칙들의 영역을 15가지 영역으로 제시하며, 각 법칙의 영역은 고유한 영역 주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것들은 각각 수, 공간, 운동, 물리, 생물, 감각, 분석(논리), 역사, 언어, 사회, 경제, 미(美), 법, 윤리, 그리고 신앙의 법칙 양상(law-sphere)들이며, 이는 전문 과학들에 의해 연구된다.
물론 오늘날 도예베르트의 학문관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분과 과학의 전문화로 말미암아 연구 영역이 수많은 영역들로 세분화됐더라도, 기본 원리는 유지된다고 본다. 즉 모든 학문들의 배후에 철학적 전제가 있고 그 배후에 종교적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창조주께서 경계로 정해놓으신 각 법-영역 고유의 원리의 자율성과 영역 주권이 있고, 이것은 연구자 주체의 신념과 관계없이 창조법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보이는 학문 활동도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자세한 논의를 할 수 없으니 제임스 A. 스미스의 <급진정통주의 신학>에서 발췌한 표로 대신하고자 한다.
<표>에서 제시된 신학1과 신학2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신앙은 선-이론적인 위탁(pre-theoretical commitment)으로서 모든 이론적 작업의 전제가 되는데, 신앙고백이나 성경공부 등 성도들이라면 모두가 하는 선(先)이론적인 신학을 신학1이라고 한다면, 다른 전문 과학과 같이 이론 학문으로서 신학2의 자리가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학문의 방향성이 다시금 통섭과 융합의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음도 사실이지만, 혼란 가운데 가닥을 잡기 위해서라도 학문 분류의 기본 뼈대는 인지하고 지켜 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으로 볼 때 창조-진화 논쟁은 결코 신학과 과학의 논쟁도 아니고, 종교와 과학의 논쟁도 아니다. 이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신념 체계 사이의 논쟁으로서, 상기 <표>에 의하면 철학의 영역, 나아가 종교적 신앙으로부터 비롯되는 논쟁이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얼마든지 각 분과 전문과학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열심히 그렇게 해야 한다. 소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창세기 해석에 있어 언어적·문법적·역사적·신학적 연구들의 밑바탕을 둔 보다 신중한 해석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반드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이 성경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성경 본문 콘텍스트 속에서 의도하고 추구하는 것을 해석해 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창세기로부터 젊은 지구론, 오래된 지구론, 유신 진화론 등의 논쟁을 이끌어내는 방향 자체에 대해 동의가 되지가 않는다.
나아가 어셔 주교가 성경 인물들의 나이를 계산하여 제시한 지구의 연도를 기독교에서 믿는 지구의 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한다. 참으로 지구의 나이를 알고 싶으면 성경이 아니라 지구과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생명체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으로부터 지적 존재의 원인으로 검증해 가는 지적설계론은 과학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오랫동안 정상 과학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진화론의 대안 이론으로 과학계에 자리매김하게 될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리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한상화 교수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 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ACTS 신학연구소장, 신학대학원장,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대학원장으로 봉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