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진의 북한포커스] 김정은의 당 창건 기념 연설, 유훈통치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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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지난달, 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뿐만 아니라 2시간 넘게 진행된 열병식 장면이 고스란히 우리네 TV에 방영되었다. 굳이 저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27분이 넘는 김정은의 연설 내용은 곧바로 사회각층에서 회자되기 시작했고 전문가들도 분석 및 평가를 내놓기에 바빴다. 전문가들의 분석들을 보니 거의 천편일률적이었다.

거의 다들, 김정은의 애민정신에 포커스를 맞추느라 바빴다. 좀 더 유식하게 ‘인격적 리더십’이라는 용어를 동원한 전문가도 있었다. 연설 도중 김정은이 울먹거리기까지 했으니 인민을 생각하는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제대로 우리 사회에 심겼지 싶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를 무려 56번이나 사용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정말 인민을 위한 지도자라는 느낌을 받게끔 하는 멘트들로 치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정은이 연설에서 56번이나 인민을 되뇌면서 인민을 ‘현명한 스승’으로 한껏 세우고 더 나가서 ‘역사의 전능한 창조자인 위대한 인민’이라는 신의 영역의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5년 전, 당 창건 70주년 연설에서도 ‘전지전능한 인민’이라는 표현을 썼던 김정은이다. 김정은의 이와 같은 화법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민심 달래기용인 것과 동시에 충성심을 유발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다. ‘위대한 인민’이라고 수 차례 찬사를 보냈지만 그 인민은 연설문에 있는 것처럼, “천리마를 타고 호응했고 대건설을 작전하면 속도전으로 화답했으며 당의 결심을 물불을 가림 없이 무조건 실천해내고야 마는...” 인민으로 김정은에게 절대적 충성을 하는 자들이라는 전제와 암묵적 지시가 깔려있다.

필자가 이번 당 창건 75주년, 김정은 연설 내용 속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김정은의 위상 변화였다. 정치적 위상 변화를 넘어서 왠지 유훈통치가 실종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유훈통치 실종, 세 가지 근거

김정은이 연설 중에 이런 말도 했다. “불과 5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진행된 당 창건 70돐 경축 열병식과 대비해보면 누구나 잘 알 수 있겠지만 우리 군사력의 현대성은 많이도 변했으며 그 발전의 속도를 누구나 쉽게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지침이 된 냥, 우리나라 언론매체들은 전문가들을 내세워 북한의 핵 무력 완성에 포커스를 맞추며 방송들을 내보냈다.

물론, 이것이 현재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고 초미의 관심사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김정은의 연설에는 많은 함의가 숨어 있었다. 무엇보다, 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알 수 있는 힌트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들 궁금해 했던 김정은의 리더십 양상이 그대로 드러난 연설문이었다. 물론, 이 사안에 대해서도 상반된 평가들이 나온다. 몇몇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울먹이면서 인민들에게 호소하는 연설이었던 만큼 김정은의 리더십이 매우 불안하고 리더십의 위기라고 단언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정반대로 평가한다. 오히려 김정은의 리더십은 더욱 강고해 졌다. 김일성-김정일의 유훈통치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을 만큼 말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김정은의 정치적 위상으로 유훈통치의 작동력이 느슨해졌다. ‘유훈통치의 실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그 중요한 근거를 세 가지로 들어 볼 것이다. 두 가지는 이번 김정은 연설 내용에서 분석한 것을 제시할 것이다. 또 하나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다음날 진행되었던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의 돌연 중단조치와 관련해서 제시할 것이다.

2015-2020 연설, 김일성-김정일의 위상변화 비교

지난 달, 김정은의 연설은 약 27분 넘게 진행되었다. 이 연설에서 선대 지도자들인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이 몇 번 호명되었을까? 두 지도자의 이름이 얼마나 많이 거론되는지가 유훈통치 작동의 척도 중 하나이다. 이번 연설에서는 단 두 차례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칭송하기 위해 거명된 것이 아니라 김정은이 그들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설명할 때와 인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대목에서 거론되었을 뿐이다. 연설을 시작하면서 선대 지도자들부터 칭송하는 것이 과거 김정은식 연설의 패턴이었다. 또한 인민들의 정신무장과 혁명으로 추동시킬 때 선대지도자들의 유훈을 내세우는 것이 기존의 전통적인 화법이었다. 5년 전, 2015년 당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김정은의 연설이 딱 그랬다.

그 당시 연설에서 김정은은 김일성, 김정일의 이름을 11차례나 거명했다. 연설 시작부터 김일성을 당의 창건자로,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칭하면서 두 선대 지도자들에게 인민들과 함께 가장 숭고한 경의와 영원무궁한 영광을 드린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연설도중에 ‘위대한 수령님들의 유훈을 받들어’, ‘위대한 지도자들의 영도 밑에’, ‘수령님들의 비범한 영도 아래’, ‘위대한 수령님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위대한 지도자들이 가르쳐주신 대로’ 등 문구를 바꿔가면서 거듭거듭 김일성-김정일을 칭송하였다. 이 연설에서 우리는 유훈통치 시스템이 강력하게 작동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당 창건 75주년 연설에서 김정은은 단 한 차례도 김일성, 김정일을 칭송하지 않았고 두 지도자들의 유훈이니, 영도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현재 북한의 지도이념인 ‘김일성-김정일주의’도 단 차례도 읊조리지 않았다. 김정은의 의도성이 다분히 엿보인다. 유훈통치의 실종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2015-2020년 연설, 김정은의 위상변화 비교

또 하나의 유훈통치 작동 척도 분석으로 과연 김정은이 자신을 나타내는 ‘나’라는 단어가 얼마나 나오는지 두 개의 연설을 비교해 보았다. 2015년 연설에는 ‘나’라는 단어가 단 한 차례만 나온다. “나는 당의 호소 따라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의 모든 전역에서 애국에 더운 피와 땀을 아낌없이 바치며...”라는 문장에서 딱 한번 나오는데, 이 문장에서의 ‘나’ ‘충성된 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번 2020년 연설에는 ‘나’가 몇 번 나올까? 무려 9번이나 나온다. 1) 당 창건 75주년 축하인사를 전할 때 2) 수도당원사단 전투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때, 이때 ‘나의 가장 믿음직한’이라는 표현을 썼다. 즉, 자신을 충성의 대상으로 묘사했다. 3) 인민들을 추켜세울 때 ‘나는’을 사용, 여기서도 자신을 충성으로 대상으로 묘사했다. 4) “이렇듯 강렬하고 진정어린 믿음과 고무 격려는 나에게 있어서...” 이것도 자신을 충성으로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5) 인민에게 멸사복무 한다고 할 때 나온다. 이 문장 앞에 ‘이 세상 그 누구도 바랄 수 없는 최상 최대의 신임이 있기에’가 들어간 만큼 여기서도 자신을 충성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6) “인민의 하늘 같은 믿음을 지키는 길에...” 사용했는데, 이것도 자신을 충성으로 대상으로 한 것이다. 7) “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공격적인 힘을 선제적으로 총동원하여 응징할 것입니다” 자신의 지도적 위치를 분명히 나타낸다. 예전 같으면 이 부분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선대 지도자들의 유훈을 내세웠을 것이다. 8) 핵 관련해서 다시 한 번 ‘나’를 사용했다. 9) 인민을 위해 각 기관들을 더욱 투쟁적으로 나갈 것으로 촉구한다고 할 때 사용했다.

이처럼, 이번 연설에서 김정은은 인민들의 충성의 대상이 자신이야 함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번 연설에서 ‘나’가 들어간 자리는 5년 전만 해도 김일성-김정일의 이름이 들어간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 연설에는 그 자리들에 둘의 이름을 쏙 빼고 자기 자신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북한을 여전히 ‘김일성 민족’, ‘김정일 조선’이라고 구호는 외치지만 김정은에게 있어서는 그냥 ‘김정은의 나라’가 된 것이다.

대집단체조, 예술공연 중단 조치 이유

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해 ‘위대한 향도’라는 주제로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10월 11일, 김정은이 관람한 가운데 대집단체조 및 예술공연을 펼쳤다. 당시 김정은의 굳은 얼굴이 포착되었는데, 이후 10월 말까지 진행하기로 했던 대집단체조는 중단되고 말았다. 김정은의 심기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분석들이 제기되는 이유다.

작년에도 평양에서 6월 3일부터 개막한 집단체조, <인민의 나라>가 김정은의 관람 이후 6월 10일부터 중단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그릇된 창작, 창조, 기풍, 무책임한 일본새’에 대해 심각히 비판했다고 4일에 보도했었다. 이런 점을 미루어볼 때, 이번 <위대한 향도> 대집단체조도 김정은에게 동일한 비판과 평가를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번 <위대한 향도>의 공연순서는 서장에 <<영원한 백두의 행군길>>과 <<당은 우리의 향도자>>, <<사회주의 오직 한길로>>, <<격동의 시대>>, <<민족의 영광>>의 장들, 그리고 종장은 <<우리에겐 위대한 당이 있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 구성은 지난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인민의 나라>와 2018년(9.9)에 개최되었던 <빛나는 조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18년에 개최된 <빛나는 조국> 공연은 서장 <<해솟는 백두산>>과 <<사회주의 우리 집>>, <<승리의 길>>, <<태동하는 시대>>, <<통일삼천리>>, <<국제친선장>> 등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주제만 보더라도 올해 10월에 공연한 <인민의 나라> 내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짐작컨대 김정은의 위대성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불멸의 여정>, 김정은 시대 천명

김정은은 내심, 예술공연이 자신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기를 기대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북한 문학부문에서는 김정은의 위대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1967년에 조직되어 ‘수령형상문학’을 전문으로 창작해온 4·15문학창작단에서는 올해 10월, 김정은의 혁명업적과 위대성을 형상한 총서 ‘불멸의 여정’의 첫 장편소설 ‘부흥’(백남룡 작)을 내놓았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위대성을 담은 ‘불멸의 역사’와 김정일은 ‘불멸의 향도’에 이어 김정은의 ‘불멸의 여정’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북한에서 김정은의 혁명역사, 혁명활동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된다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전히 올해 10월의 예술공연은 유훈통치적 성격으로 기존의 공연들과 같은 방식으로 꾸몄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지사다. 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다음날인 10월 11일에 김정은이 열병식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때 <김정은 결사옹위>의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김정은은 북한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북한에게 새 세기에 요구되는 시대적 정신은 곧, 김정은의 <불멸의 여정> 시기, 즉 <김정은 시대>라는 것을 김정은은 연설을 통해 강변했던 것이다.

* 이 글은 WORLDVIEW 12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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