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칼럼] 한국교회, ‘성장주의’ 이대로 좋은가?
지난해 모 기독교 방송사에서 ‘이 땅을 치유하소서’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토론자로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박사와 필자가 토론자로 함께 참석했다.
화두는 ‘성장주의의 문제점’이었다. 손 박사의 예리하고도 비판적 시각에 맞서, 건강한 성장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견해가 맞불을 놓으며 열띤 토론을 가졌다. 두세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서로 공감대를 가지며 엄청 친밀해졌다. 물론 방송은 한 시간 이내로 나갔지만 말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주의는 시대마다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 1884년 초기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 교회와 한글성경 보급 등을 통해 민족을 계몽했고,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고난 속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핍박 속에서 소망이 없었던 교회는 오직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을 지녔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후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하여 일사각오 순교신앙을 지켰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경직 목사님, 빌리 그래함 목사님 중심으로 반공과 부흥운동을 통해 엑스플로74와 77년 5천만 민족복음화 성회를 통해 부흥을 경험했다.
1980년대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평신도를 깨운다’는 지적 성장을 도모하는 제자훈련이 유행된 적도 있었지만, 1970년대 풀러신학교 맥가브란 박사와 제자 피터 와그너에 의해 시작된 교회성장학이 국내에 전파되면서 오순절 은사운동 즉 정적 신사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성장에 목마른 교회는 기름에 성냥불을 넣듯 성장주의 불길로 나타났다. 하지만 2000년대 성장이 멈추고 오히려 성장에서 추락하자,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멈추면서 비로소 보여지기 시작했다.
그런 성장의 반사작용으로 자각으로 일어난 것이 ‘교회 건강’이다. 교회는 고혈압, 당뇨의 원인이 되는 덩치를 키우는 성장에서 ‘건강’으로 가야한다. 비만은 건강이 아니었다.
군대 시절, ‘전방이 살아야 후방이 산다’ 는 말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가 살아야 큰 교회도 살고, 큰 교회가 살아야 작은 교회도 살 수 있다. 교회성장, 이제는 경쟁 구도가 아니라 상생 관계이다. 한국 6만 교회가 있는데,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각자 역할이 있다.
간혹 이런 착각에 빠질 수 있다. 큰 교회도 문제가 있고, 작은 교회는 문제가 없다는 식 말이다. 큰 교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 작은 교회도 아름답다면, 큰 교회도 아름다운 점이 있다.
큰 교회 다니면 큰 믿음이고, 작은 교회 다니면 작은 믿음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 큰 교회에서 목회하면 큰 목사이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 작은 목사인 것이 아니다. 이런 동역자 의식을 잃어버린 차별이 교계를 양극화시킨다.
문제는 작은 교회가 무조건 큰 교회를 흉내내고 따라한다는 점이다. 교회는 찍어내는 ‘붕어빵’이 아니다. 교회마다 주신 비전이 다르다. 예를 들면 교인이 10여명인데 허구헌날 1만명 초대형 교회 성장 노하우를 배우러 다니다 보니, ‘경영학에 물든 기독교’가 되었다.
두날개, 세날개, 전도폭발, 총동원 등의 관념도 벗어나는 것이 좋다. 각자 교회에 주신 고유의 정체성, 공동체문화, 지역 공동체와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내야 건강한 교회로 나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다.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더 실감하게 된다. 코로나 상황에서 성장은 생존이다.
그러다 보니 성장을 위해 목회자 스스로 ‘성장’이라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린다. 개인주의(스타의식, 영웅)는 개교회주의를 심화시키고 교회가 상호 연합이 되지 않게 한다. 물량을 투입하면서 52주 성장용 이벤트를 가동했다. 전도폭발, 총동원 전도 등 성장 피로감은 성도들도 못 버텨낸다.
더 큰 문제는 목사와 장로 갈등요인으로 자리한 것이다. 성장프레임에 갇혀 성장을 못 시키면 목사를 내보내고, 그러다 보니 차량 운행, 교인 쟁탈전을 하기도 하고, 교회의 기업화를 촉진하는 지성전, 즉 프렌차이즈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역사와 삶으로부터 분리돼 건강한 역사의식, 애국심, 자유, 정의, 생명, 진리, 평화 등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사회적 책임과 기여를 상실했다.
이제는 ‘성장’에서 ‘건강’으로 영적부흥으로 돌아서야 한다. 코로나는 우리를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가 되게 했다. 어찌 보면 1만명 모이는 한 교회보다, 100명 모이는 100개 교회가 더 건강한 구조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건강해지는 길을 함께 모색해야 상생이 가능하다. ‘성장’에서 ‘건강’으로 캐치프레이즈를 전환하고, 분립 개척과 분가 독립을 모색해야 한다. 꾸준한 의식개혁과 설득 노력을 통해, 상생을 추진해야 한다.
로마의 핍박에서도 카타콤 교회가 그 시대를 살려낸 것에 주목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교회의 지향점도 달라진다. 요즘은 공교회성 필요에 더 주목하면서, 바른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묻게 된다.
이는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교회의 본질이자 교회의 표지 3가지 정도를 짚어본다면, 성경적으로 베드로나 스데반 집사처럼 성경적 바른 신앙고백과 바른 말씀 선포가 전제되어야 한다. 삶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교회여야 한다. 선교적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가 정답일 것 같다.
코로나로 한국교회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천지나 이단, 사이비 및 돌팔이 같은 회복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남겼다.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참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는 코로나가 아니다. 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됨과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늘 고백하던 그 예배를 잃어버린데 있다.
머리 잘리고 두 눈 뽑힌 삼손처럼 야성과 영성을 잃어버린 교회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핏값 위에 오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새삼 묻게 된다. 진정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고 있는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이어받고 있는가. 6·25 전쟁 당시 이념 앞에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그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순교자』란 작품에서 보듯, 숨은 순교자들이 곳곳에 아직도 있다.
일사각오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십자가 신앙으로 교회 폐쇄에 맞서 한 몸을 던진 손현보 목사와 부산 세계로교회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세상적 시각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면 그 길을 그렇게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주님, 이 땅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주님, 교회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 주님께서 가슴에 품고 있는 그 교회가 우리의 소망이 될 때,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