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김정은이 2021년을 선대지도자들을 참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김정은은 1월 1일 0시에 제8차 당 대회 대표자들과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했다. 김일성-김정일 입상 앞에서 김정은은 제8차 당 대회를 ‘당과 혁명발전의 일대 분수령’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노동신문은 밝혔다. ‘분수령’은 중의어이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사태가 발전하는 전환점 또는 어떤 일이 한 단계에서 전혀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즉,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정은이 언급한 ‘분수령’은 과연 어느 쪽 일까?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한 후, 김정은은 2021년 신년사 대신 연하장 성격의 친필 서한을 내놓았다. 내용은 그대로 북한주민들에게 새해인사 정도였다. 김정은은 서한에서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기 위하여 힘차게 싸울 것’이라는 결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적시한 ‘새로운 시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달 5일부터 개최된 제 8차 당 대회, 김정은의 개회사와 사업총화보고에서 얻을 수 있겠다. 당대회에서의 김정은의 발언을 통해 초미의 관심사인 대남대미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그 속셈을 파악해 보자.
당 대회 개회사, 대외정책 불투명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의 혁명사상과 위업에 철저히 충실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면서 개회를 선언하였다. 그는 개회사 서두에서 8차 당 대회가 혁명발전에 매우 중요하고도 책임적인 시기에 소집되었다고 했다. 뒤이어, 김일성-김정일 선대지도자들을 칭송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이런 태도는 작년 75주년 당 창건식 기념사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칭송은 고사하고 일절 언급도 없었다. 당 규약 서문 첫줄에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당이다” 또 중간부분에 “조선로동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하는 김일성-김정일주의 당이다”라고 명시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번 개회사에서는 김일성-김정일에 대해 수차례 언급을 했다. 참고로 당규약 서문은 유일사상 10대원칙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더불어서, 당 규약은 김정은 정권의 정당성 및 그의 지도적 권한, 정치적 위치를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당 대회를 ‘대내외형세의 변화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특기할 정치적 사변’이라고 했다. 우선 대외형세만 보면, 당 대회를 통해 대외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발언이다. 한편, 당 대회 소집자체가 ‘혁명을 승리의 다음단계로 이끌어나가려는 당의 확실한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한 만큼, 계속적으로 같은 외교노선으로 가겠다는 입장으로도 비췬다. 이처럼, 개회사만 봐서는 차후 북한의 외교적 방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수법으로 보였다.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제8차 당 대회를 ‘일하는 대회’, ‘투쟁하는 대회’, ‘전진하는 대회’라고 천명하였다. 두 번째, ‘투쟁하는 대회’는 투쟁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정립하겠다는 의지이다. ‘전진하는 대회’는 2016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수립한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고 상당히 미달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내걸은 것이다. 김정은은 목표 미달의 이유를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로도 눈을 돌렸다. 그가 개회사에서 밝힌 것처럼, 북한은 당 대회 4개월 전부터 80일 전투에 돌입했고 동시에 전방위적인 검열을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회사 내용 중에 <비상설중앙검열위원회>를 조직하고 파견하여 철저히 현장실태조사를 했다고 했다(원래 당중앙 검열위원회는 상설조직으로 리상원이 위원장임). 내부 불순방해세력들을 발본색원하려는 목적에서다. 이 검열에 걸린 케이스가 바로 지난 작년 10월초에 적발된 평양의학대학 성적학대 사건이다. 피해자 여대생이 자살하고 그의 어머니가 중앙당에 신소를 올렸는데 묵과 된 사건으로 가해자인 남학생들은 공개처형을 당하고 신소처리부장을 비롯해 책임일군 및 그 가족들 수십 명은 숙청을 당했다. 이들은 비사회주의적 행위자로 ‘당의 유일사상체계 파괴 및 유일적 지도체제를 좀 먹는 무서운 사상 독소’라는 비판을 받으며 반당분자로 박멸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이들은 졸지에 북한의 국가 목표 달성을 가로막는 주범들이 되었고, 국가발전을 저해한 장애물, 불순물이 되어 버렸다.
개회사에서 김정은이 경제발전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자인한 것에 대해 몇몇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스스로 책임감을 통감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김정은은 그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당 대회 4개월 전부터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서, 당 대회 이전 지난 5년간의 당 재정사업도 철저히 조사했다. 이 검열 및 조사에서도 또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었을 것이다. 당 재정뿐만 아니라 당 지도기관 성원들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조사한 만큼 검열에 걸린 이들은 상당히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당 대회 결정으로 당중앙위에 속한 검열위원회와 당중앙과 별도 기관이었던 검사위원회가 검사위원회로 통합된 것을 볼 때 당지도부에 대한 더욱 철저한 감시 및 통제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새로운 규률감독체계’라고 표현했다. 13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의 당대회 결론에서 “당과 국가, 군대사업으로부터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내재하고 있는 편향과 결함들이 구체적으로 신랄하게 비판총화되었다고 한 만큼 조만간 적지 않은 이들의 숙청소식을 접하게 될 것이다. 당대회 4개월 전에 조직된 비상설검열위원회는 대외기구 성원들에게도 칼을 들이댔다.
김정은의 개회사만 봐서는 향후 북한의 외교정책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당 대회 첫날부터 시작된 김정은의 사업총화보고에서 그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업총화 보고, 대남 미온적-대미 강경 메세지
첫째 날, 사업보고에서 김정은은 당중앙위원회의 사업정형을 개괄적으로 언급하면서, 성과와 결함의 두 측면을 엄격히 총화했다. 그러면서 핵심 투쟁노선과 전략전술적방침들을 제기하였다. 다음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수행에서의 결함을 분석하면서 전반적 경제부문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것을 주문했다. 둘째 날, 2차 보고에서는 교통, 건설, 대외경제 부문 등의 실태를 분석 새로운 5개년 계획기간의 목표와 실천방안을 상정했다. 이날, 국가방위력에 대해서도 다루었는데, 보다 높은 수준으로 강화할 것을 천명하면서 그 목표들을 제기하였다. 셋째 날, 3차 보고에서는 사회주의문화 모든 분야를 다루면서 새로운 개화기를 열어나가기 위한 방향성을 제기하였다. 특히, 당의 외곽단체인 청년동맹과 근로단체들이 큰 질타를 받았다. 이는 사상무장투쟁을 더욱 강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이후 진행된 세 번째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대외관계발전을 위하여>보고에서 김정은은 포문을 열었다. 김정은은 남북관계에 대해 심각한 교착상태를 수습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느냐, 대결의 악순환과 전쟁의 위험 속으로 가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고 운을 떼었다. 남북관계 현 상황은 ‘판문점선언 발표이전시기’라고 진단했다. 남한이 군사적 적대행위(한미군사훈련, 핵전략자산도입)를 하고 있다면서 남북관계 경색 책임을 남쪽으로 떠넘겼다. 남한당국이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여운을 남기면서 말이다. 이것은 친미하지 말라는 주문이다. 곧 바로 이어진 대미정책을 언급한데서 더 욱 더 분명해진다. 김정은은 미국에 대해 ‘불법무도하게 날뛰는 적대세력’, ‘최대의 주적’이라고 하면서 강대강 전략으로 미국을 제압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바이든 신행정부가 들어서도 대북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항미 전략을 구사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운을 남긴 대남 메세지와는 달리 대미 메세지는 매우 강고했다.
다섯 쨋 날에는 당규약 개정에 대해 토의했다. 당규약 개정을 통해 김정은이 당 위원장에서 당 총비서로 호칭이 변경될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각급 당위원장을 책임비서, 비서로 전환하고 정무국을 비서국으로 바꾸는 것에서 충분한 힌트가 주어졌다. 예상대로, 당 대회 마지막 날 김정은은 당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김정은이 당 총비서가 되었다는 의미는 선친 김정일(영원한 총비서)의 권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당 규약 개정 목적에서 ‘당의 령도력 강화’를 내걸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실발전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여’라는 문구도 나오는데, 이것은 김정은이 당 대회 내내 ‘사회주의 건설의 획기적인 전진’과 연결된다. 필자가 가장 주목한 것은 총비서 추대사 안에 김정은을 가리켜 ‘‘수령의 지위’를 가졌다고 묘사한 점이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김정은을 수령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지도력 급부상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단초라 하겠다. 앞으로는 총비서를 넘어 수령으로 불려 질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당장, 17일 개최되는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으로 추대될 수 도 있다고 보여준다. 이미 2019년 8월 개정헌법에서 김정은의 지위 및 권한은 김일성-김정일을 뛰어 넘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김여정에 대해서도 짧게 기술하면, 비록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누락되었지만 당 대회 첫날 집행부 일원으로서 주석단에 앉을 것을 볼 때, 또 당중앙위원으로 20번째 거명된 것을 볼 때 그 파워는 여전히 막강할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조직된 당검사위원회를 이끌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김정은이 당 대회 이후 바로 이어진 당중앙위 제8기 제1차 전원회의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당검사위원회 조직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가는 말
마지막 날 폐회사에서 김정은 2021년을 2020년과 마찬가지로 ‘정면돌파의 해’로 선언하면서 ‘자력갱생’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외교관계를 현상유지 하겠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핵전쟁억제력을 보다 강화하면서 최강의 군사력’으로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그 어떤 형태의 위협과 불의적인 사태’에도 굴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국제사회의 요구인 북한의 비핵화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더욱 미친 듯이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예단까지 하면서 말이다.
필자에게는 당대회에서의 김정은의 대남, 대미 메시지는 당 대회 첫날 축사를 보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대한 답사로 보여 진다. 중국 공산당이 보낸 축사 마지막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정세하에서 중국측은 조선측과 함께 두 당, 두 나라 최고령도자들의 중요한 공동인식을 지침으로 하여...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실현하는데 새롭고 적극적인 기여를 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그 전부터 수 차례 밝힌 중국의 입장이었고 중국은 남한의 문재인 정부에도 이런 입장을 전달했었다.
북한의 제8차 당 대회를 맞아 중국은 다시금 지역 내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김정은은 당 대회를 통해 중국에 화답한 것이다. 김정은이 대미적대정책을 강력하게 어필한 만큼 바이든 신행정부는 매우 골치가 아플 것이다. 자칫하면 동북아 정치지형 주도권이 중국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남·북·중 안보협력체계가 작동될 위기가 온 것이다.
이번 당대회를 통해 김정은은 시진핑의 내민 손을 확실히 붙잡았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를 향해 잘 선택하라고 미끼를 던졌다. 김정은의 답방, 남북정상회담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 정부가 그 미끼를 덥석 문 것 같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한국의 운명은 좌우될 것이다. 2021년 한해는 작년보다 더 시끄러울 것 같다는 예감이 스친다. 독일이 통일이 되기 전 서독정부가 보수, 진보 관계없이 친미일변도로 나갔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통일에 도달하려면 말이다.
* 이 글은 WORLDVIEW 2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정교진 박사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