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100
성경 말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1.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 안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지속적으로 걸어가면(페리파테이테; περιπατεῖτε)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16절). 우리에게는 육체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성령을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고, 성령은 또한 육체를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습니다(17절).
아무리 거룩함의 완전을 이룬 자라 할지라도 경험상 육체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단계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살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때 우리는 이 성결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였다’(롬 6:6; 갈 5:24)는 표현은 성결의 능력에 대한 현주소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이럴 때는 ‘죄를 죽이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영혼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드린다면, 죄와 육체의 소욕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 우리 안에서 죽은 것과도 같습니다.
2.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영혼과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카르포스; κάρπος)라는 단수형의 단어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성령 안에서 자라나는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니신 품성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갈 5:22-23).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따르면서 살아갈 때, 여기에 성령의 열매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열매는 나오는데 또 어떤 열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한 성령을 품고 살아갈 때, 우리의 인품 속에는 자연히 성령의 품성인 이런 특성들이 모두 나타나게 됩니다. 단, 그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어떤 열매가 특히 두드러지게 자라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이 말씀은 성경의 다른 곳의 십자가에 못박힌 표현이 대부분 수동태로 되어 있는 반면, 여기서는 적극적인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에스타우로산; ἐσταύρωσαν). 이것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수동태의 우리가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활용해야 할 것을 단호하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육체의 일을 행할 수도, 성령의 열매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신자 자신의 결단인데, 이 말씀은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자의 믿음의 고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3.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점점 닮아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나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여러 번의 교훈에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walk, 16절),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be led, 18절), 성령으로 살면(live, 25절), 성령으로 행할찌니(walk by rule, 25절) 등에 나타나는 행하다(페리파테이테; περιπατεῖτε), 인도 받다(아게스테; ἄγεσθε), 살다(소멘; ζῶμεν), 행하다(스토이코멘; στοιχῶμεν)는 이 네 동사는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단회적인 체험이나 기도의 몰입 체험 또는 일정기간동안 세상과 격리된 수도생활 등으로 인해서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대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란 순간마다 지속되어져야 할 일상 속에서의 경건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어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규범과 실천 그리고 계율에 의해 자신을 복종시키며 살아가는 삶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ego)으로 부풀어 있는 삶을 살뿐입니다. 성령의 주되심(Lordship of Holy Spirit)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품성이 나타나는 것은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모든 열매는 다 주님의 품성이기 때문에, 단지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갈 때 그분은 자신의 품성을 우리 인격 속에 열매 맺게 하십니다.
어려운 용어 풀이: 옛사람의 죽음
‘옛사람’이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악된 본성 또는 죄악으로의 경향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웨슬리안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크게 대치되어 왔습니다. 웨슬리안파에서는 성경대로 옛사람의 즉각적인 처리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고, 개혁파 쪽에서는 옛사람이 실제적으로 죽어 죄성이 더 이상 발동하지 않는 단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개혁파의 케직(Keswick) 계통은 조화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죄성제거설’(Eradication)은 영적 사실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성결의 근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영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강조할 때 당연히 ‘죄성제거설’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편 케직의 노선은 경험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입니다. 이 노선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겨나가는가에 대한 경험의 차원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죽었다’고 외치더라도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는 바와 같이, 죄의 유혹은 경험의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죽었으니까’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적용하여 경험적으로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사는 것이 바로 이 두 노선상의 조화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사실과 경험의 차원은, 결코 상호 논쟁의 대상이 아닌, 성결론의 충족한 이해를 위해 함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령사역을 위한 질문
1. 거룩함의 완전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죄의 죽음’에 대한 양면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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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령의 ‘열매’라는 단어가 단수형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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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나는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여러 번의 교훈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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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적용을 위한 기도
1. 날마다의 삶속에서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성령의 열매 맺는 삶 속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배본철
성결대학교 교수
성령의삶 코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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