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본회퍼, 오해와 편견 (11)
완다의 삶, 고유성 억지로 만드는 현대 인간상 표본
신앙·윤리 없이 자기 만족 위한 결단 용기로 내세워
인간의 고유성, 하나님과 타인 섬기는 실존의 조건
디즈니-마블의 <완다비전> 속 존재론과 본회퍼의 기독교 철학(2)
◈신학과 실존: <완다비전> 속의 실존적 한계 폭로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에서 주된 비판 대상이 되는 철학 사조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칸트로부터 발흥해 헤겔과 신칸트주의로 이어지는 독일 근대 계몽주의 인식론, 둘째로는 후설, 셸러,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독일 현대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본회퍼의 독일 계몽주의 인식론 비판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를 자의적으로 대상화하는 행태에 깃든 교만의 심성을 지적하는 데 주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와 달리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 비판은 존재 자체에 대한 파악은 포기하는 대신, 체험되는 한도 내에서의 삶을 실존론적 결단을 통해 자기 것으로 삼아버리려 하는 기묘한 독단적 태도를 문제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서구 학계에서는 인식, 즉 ‘앎’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정확한 앎이 인간을 불행과 죄악에서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늘어도 죄성과 비윤리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류를 보고서, 현대인들은 깨달았다. 결국 주어진 대로 사는 것 외에 삶이란 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진보에 대한 확신도,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도, 결국 삶이라는 한계 내에서는 참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아챈 것이다.
이러한 깨우침은 현대 현상학과 실존철학의 탄생을 주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나님의 계시로부터도, 인간의 계몽으로부터도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한 현대 서구 사상가들은 앎을 포기하는 대신 삶 자체를 긍정하고, 무지 속에서라도 자신의 결단을 믿고 우직하게 자기 삶 본연의 개별성을 향유하는 고독하면서도 용기있는 인간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이런 현실적인, 혹은 체념적 깨달음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의 본모습임을 폭로한다. 그는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는 무신론적이고 실존론적인 결단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독단적이고 유아적(唯我的)인 삶의 향유를 위한 자기폐쇄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디즈니-마블의 TV 시리즈 <완다비전>은 이렇듯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그 스스로를 자기가 처한 세계의 유한한 주(主)로 옹립하고서, 불행과 고난, 죄성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에 만족하며 용기있게 자기의 삶을 기투(企投)하는 가련한 자유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완다비전> 속 완다는 알려지지 않은 빌런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처지를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완다가 자기 삶의 실재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완다는 무지 속에서 그저 자기가 바라는 바, 의미있게 여기는 바를 추구하며 사는 데 만족하고 있다. 시리즈의 남은 서사가 어찌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완다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본회퍼가 경고했던 유아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과 실재: 진정한 고유성은 신앙의 윤리를 위한 고유성
본회퍼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유일하게 계시된 삶의 실재 혹은 실상이란,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이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본회퍼가 보기에는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혹은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용기가 넘친다고 해서, 온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전한 인격은 자기 앎의 한계 및 자기 존재의 한계를 절감하고서, 초월자이신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순복하는 인격이다. 이러한 신앙이 없이 인간 인격은 커다란 결함을 가진 인격, 그 가능성을 개화하지 못하는 미숙한 인격으로 남을 뿐이다.
그리고 본회퍼는 이런 온전한 인격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뿐임을 역설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아의 인식에 대한 타자의 초월성을 존중하고 타자성을 보존하며 수긍하는 실천만이 한 사람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준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보다 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했다. 이는 그가 복음의 중요성을 아예 무시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진정 복음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은 윤리적 결단과 실천 면에서도 온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본회퍼가 인간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바라봤던 실존론적 결단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적 결단이었다.
인간이 피투(彼投)된 실존적 정황 속에서, 무지와 죄성과 무능력에 몸부림치면서 결단해야 할 것은 자기 삶의 고유성을 붙들는 일이 아니라 타자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일이다.
거짓됨과 참됨에 관계없이, 자기를 초월해 있는 현실에 관계없이 그저 자기 능력이 닿는 한에서 자기 세계를 마음껏 만들어가는 <완다비전> 속 완다의 삶은, 자기 삶의 고유성을 억지로 만들어가는 현대적 인간상의 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도 윤리도 없이 자기 만족을 위한 결단을 삶의 용기로 내세우고, 이러한 행태를 윤리적이라고 포장하는 것이 오늘날 개별화된 삶을 드높이는 시대정신의 실상이다.
자긍심이 기반이 되는 삶의 개별화는 본회퍼의 관점으로 볼 때 무신론적이고 실존론적인 결단으로 분류된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줄기차게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민족적 고유성을 미화하고, 사상적 주체성과 자주성을 신격화하며, 초월적인 것의 존재를 수긍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를 겸손히 돌아보는 자세를 망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잘한 것은 침소봉대하고, 잘못한 것은 기를 쓰고 은폐하며 자긍심을 자기 고유성과 등가로 취급하는 태도 가운데서는 어떠한 반성과 회심도 찾아보기 어렵다. ‘K-방역’, ‘K-Culture’ 같은 실체없는 용어들을 유행시키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고통을 은폐하기에 급급한 것이 현재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문화적 분위기이다.
본회퍼의 신학은 인간의 고유성이 자긍심과 자기 만족을 위한 실존적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과 타인을 섬기기 위한 실존의 근본 조건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인간이 고유하면 고유할수록, 그는 더욱더 자기 죄성을 깨닫고, 자신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신앙의 책임,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본회퍼 신학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완다비전>은 인간의 유아적인 결단행위와 몰(沒)윤리적인 고유성, 개별화 이념의 비실재성을 보여주는 비판적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작품 속 완다의 삶의 모습을 단 한 마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있다.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 개구리이다. 그리고 이는 실상 오늘날 한국인들이 세속의 조류에 밀려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환영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