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절해 1년 8개월 옥고 치른 아버지…”

|  

[김명혁 목사 설교] 김관주 목사님의 귀중한 영적 유산

▲김명혁 목사는 “지금의 여러 상황이 비록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과 용서,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크투 DB

▲김명혁 목사는 “지금의 여러 상황이 비록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과 용서,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크투 DB

3.1절을 맞아 크리스천투데이 편집고문이자 강변교회 원로이신 김명혁 목사님의 설교문을 게재합니다. 매주 작은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자비량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은 오는 3월 14일 개포동 사랑의빛교회에서 부친이신 김관주 목사님을 기리는 설교를 하실 예정입니다. 김관주 목사님은 일제시대부터 평안북도 신의주 지역에서 목회하시다가 6.25를 앞두고 북한에서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편집자 주

본문: 히브리서 12장 1,2절

열한 번째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저를 불러주신 신상문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무슨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한국교회가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신상문 목사님이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김관주 목사님께서 물려주신 귀중한 영적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강의 또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2020년 7월에 『숨겨진 아름다운 목회자들(아벨서원)』에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기고한 일이 있는데, 오늘 그 기고문의 내용을 거의 절반으로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고문의 글을 인용하기 전에,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한 마디로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제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한 평생을 살게 된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 때문이지만, 또한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신 그리고 그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저에게 물려주신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사랑과 기도와 격려의 손길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라는 제목의 글을 줄여서 인용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 하시다가 1950년 6월 23일경 45세에 순교하신 분이 바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金冠柱) 목사님이십니다. 아버지는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에서 안주 동교회 김현하 영수님과 김정숙 권사님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성리학의 학문을 중시하던 유교 가정에 시집 와서 남편과 아들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신 분은 주일 성수와 산 기도에 전념하며 온 동네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한 김정숙 권사님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신앙으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어 영수가 됐고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의학 전문을 나온 여의사와 결혼을 해서 1937년 6월 4일 저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동경신학교를 마친 후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일본에 들려서 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신의주 제2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부목사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로 9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아버지가 이따금씩 저를 칭찬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무엇을 물어보시면 제가 대답을 하곤 했는데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신의주 감옥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절대 반대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뵙지 못하고 감옥 담장 밖에서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쳐서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 소리를 돋우어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라는 노래를 불렀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46년 5월까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시다가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참여하는 정치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습니다. 공산정권은 결국 협조하지 않는 아버지를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체포해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데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도록 처리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죄수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사동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동료 죄수들의 존경을 받고 간수들의 신임을 받는 모범 죄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제가 평양 제5인민학교를 다닐 때 일요일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2년 동안 월요일마다 벌을 서고 매를 맞고 정학까지 당하면서도 주일 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아버지의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문밖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 주일 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가르침을 저의 몸과 마음에 깊이 심어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제가 주일 성수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다음 달인 1948년 8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싶은 소원을 지니고 11살 나이에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월남했습니다. 이제부터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앙과 기도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후 목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에서 아버지 김현하 씨와 어머니 김정숙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김정숙 씨는 결혼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착실하게 믿었는데, 불신앙의 가정으로 시집 온 후 한 평생 기도와 주일 성수의 신앙으로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다고 합니다.

남편과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는 어린 손자(명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 손자로 하여금 우산을 받혀 들게 하고 눈물의 기도를 새벽마다 드렸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습니다. 남편은 집사와 영수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도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신앙과 성격을 빼어 닮았다고 저의 사촌 형인 김명길 목사가 말해주었습니다.

저의 친할머니 김정숙 권사님은 교회 봉사에 충성을 다했는데 때로는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 때 설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일 성수에 철저했는데 주일에는 농사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주일날 절대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수 때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논과 밭의 추수가 제일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또한 자녀와 손자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말하면서,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저의 아버지는 기도와 주일성수의 신앙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강직하고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진실한 성격을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저의 사촌 형이 말해주었습니다. 아마 그 신앙과 성격의 유산의 일부를 저도 물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선교사들과 친하게 사귀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지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중간에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하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만이 민족을 흑암과 절망에서 건지실 분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법학에서 신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모세처럼 민족을 구하고 지키는 하나의 촛불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또한 일본에서 공부를 할 때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을 돌아보고 돕는 유학생 모임의 총무의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즈음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던 한경직 목사님이 일본 동경에 잠깐 들렸는데, 그 때 저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한 후 일본에 연락을 해서 저의 아버지를 부목사로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한경직 목사님 초청을 수락해 1938년부터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김관주 전도사를 소개했다. 김 전도사는 본래 일본 동경 일본신학교(동경신학대학의 전신) 출신으로 내가 미국에서 나오는 길에 동경에 들러서 알게 된 사람이다.

김 전도사는 일본에서 의학전문을 나온 여의사 부인과 함께 난지 얼마 안 된 아들(지금 합동신학교 교수인 김명혁 박사)과 함께 부임했다. 교회는 사택도 마련해주고 부인이 의사였기 때문에 병원도 마련해주어 애린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의료봉사 사역도 잘 했다.

일년이 지난 후 김 목사는 열심히 교회를 받들어 섬겨 유능한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원래 장자의 풍이 있는데다 강직하고 진실하고 능력도 있어 일제 말기 때 당국과의 마찰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미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내가 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돌보지 못하게 되자(1942년경), 그 뒤를 김 목사가 맡아 평북교계를 이끌고 나가는 중심인물이 되었다(한경직, 「장로시무 핸드백」, pp. 317-318).”

둘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신의주 제2교회 출신인 김치선 박사님은 1996년 8월 24일 미국에서 제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김치선 박사님은 서울대 법대 학장과 숭실대 총장을 역임했는데, 편지에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일본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지적했습니다.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실 무렵 저는 중학생이었으며 일본 총독정치가 점점 기독교를 탄압하고 교역자들의 목회활동을 감시 내지는 시찰을 강화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가급적 일본어를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당시 일본 신학을 졸업하셨기에 일본어를 문법적으로 또는 발음에 있어 능하실 터인데도 의식적으로 부자유스럽게 표현하시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어로 설교와 기도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옷차림은 일요일은 물론 항상 한복을 착용하셨습니다. 심방 오실 때에도 꼭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고무신을 신으셨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외출복으로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3월에 소생의 결혼식을 주례해 주셨으며 그때에도 한복 차림으로 수고하셨는데 매우 뜻있게 생각했습니다. 1945년 8. 15 해방이 되고 공산군의 교회활동에 대한 감시가 시작될 때 약 2개월간 중. 고등학교 성경공부를 할 때에 교회 종각(4층) 밀실에서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김양선 목사님은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에서 저의 아버지가 신의주와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로 민족독립 운동과 남북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을 기술했습니다.

“1946년 해방 후 첫 번 3.1절 행사를 신의주 동교회에서 수천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김석구 목사의 사회로 성대하게 거행했는데, 공산당들이 3.1절 행사를 극심하게 반대했다.

공산도배들은 수천 군중을 이끌고 동교회로 달려들어 성단과 성경을 훼파한 후, 김석구 목사를 끌어내어 우차에 싣고 ‘민족 반역자’ ‘미국의 주구’ 등의 극악한 문구를 목에 걸어놓고 시내를 일주하며 갖은 야유와 모욕을 가하였다.

의산 노회장 김관주 목사는 공산도배의 이와 같은 만행을 남한에 알리기 위하여 동 17일 신도대회를 소집하고 성토연설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이유로 본격적인 교회탄압을 시행하였으며 지목되는 지도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 67).

이 일로 인하여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정의를 사랑하는 의협심이 강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도 그랬지만, 저의 아버지가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 분노나 증오심은 품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북한 동족을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양선 목사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당이 결성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나 언제나 한번은 남북통일 정부수립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회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민주주의 정당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 토의가 결정되어 앞으로 미국의 한국 독립안이 상정될 것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원안대로 결정된다면 남북통일 정부의 수립은 목척 지간의 일로 보여졌다.

그러므로 김화식 목사는 김관주 황봉찬 우경천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를 적극 추진하였고 1947년 11월 19일 결당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당식을 하루 앞둔 11월 18일 내무서에 탐지된 바 되어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검속 투옥되었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p. 64-65).

한경직 목사님도 그의 저서 「장로시무 핸드백」에서 아버지의 기독교 자유당 결성준비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해방 후 신의주에서 윤하영과 필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 최초의 정당 기독교 사회당이 조직되었을 때 상해 임정 요인 이유필 씨를 당수로 하고 조직되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와해되었고, 평양에서 고당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조선 민주당이 조직되었으나 소련정치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감금된 무렵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 김진수 목사, 김관주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장차 있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대비하여 기독교 자유당을 세우려 획책할 때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추대했다.” (한경직, 「장로시무 핸드백」, pp. 313-314).

결국 아버지는 이 일로 인해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님 등과 함께 투옥되었고 그 후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다가 6. 25전쟁 이틀 전인 1950년 6월 23일 경에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무엇보다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경 말씀들 중 하나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김관주 목사님은 1938년부터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하였고 1942년부터 1946년까지는 담임 목사로 목회를 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아버지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습니다. 일제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끌어다 회유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절했고 그 일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1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또 다시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학생 시절 신의주에 와서 얼마 동안 우리들과 함께 살았는데, 김명길 목사는 1996년 9월 8일 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일제 요시찰 인물로 설교권을 박탈당하자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2교회 동사 목사로 목회를 하셨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강한 어조로 명령형이면서도 호소적이었는데 그때 받은 강한 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배 시간 30분전에는 강단 옆방에서 준비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고 있어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설교 시 애용하여 자주 인용하신 구절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인데 전 절을 다 읽으시곤 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등이었다.

또한 애창한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383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등이었다.

김 목사님이 의산 노회장으로 피선되었을 때 소련군이 의주 교회당에 침입한 것을 인민위원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인민해방군이 무례하게 성전에 군화를 신고 침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사과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인민 정치 보위부 요원이 이남에서 왔다는 편지를 김목사님에게 전해주고 갔는데 이것을 빌미로 재 수감 입건하여 조사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저의 아버지는 1947년에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했는데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잡혀갔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신의주에 있을 때나 평양에 있을 때,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님과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김관주 목사님이 평양 사동 탄광에 갇혀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아버지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저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장로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량욱 목사가 사촌 형을 불렀다고 합니다.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하네. 사동 탄광에 있는 숙부를 찾아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게. 이제라도 우리와 손 잡고 일을 해 보자고 말일세.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일세.”

김명길 목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사동 탄광에 김관주 목사님을 면회 갔을 때, 한번은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에게 말씀 드려서 큰 아버님을 석방하도록 건의할 터이니, 나오셔서 강 목사님과 함께 손잡고 목회하시며 신학교에서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정색으로 강하게 표현하면서, 내가 강 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시는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셨다.”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이승만 목사님은 1996년 7월 9일자로 미국에서 저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이승만 목사님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미국장로교회 (PCUSA) 총회장을 역임한 미국교회와 미국 한인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여러 면으로 수고 많이 하시는 소식을 늘 듣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옛날 김관주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시던 장엄한 모습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깊이 남았지요. 제가 그때는 어렸으니까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그때의 형편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기독교 자유당 결성과 관련하여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빛과 소금」의 윤세민 기자는 저와의 대담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1948년 7월, 만 열한 살의 어린 소년 명혁은 평양시 외각의 사동 탄광을 찾았다. ‘예수 믿는 반동들의 괴수’로 몰려 탄광에 강제 수용돼있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명혁은 얼마 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교회 강단에서 힘차게 설교를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과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 그대로였다.

‘아니 명혁이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허허 이런 녀석…’

아버지와 아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고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어린 명혁은 나이답지 않게 무겁게 입을 뗐다.

‘아버지 나 남조선 갈래요!’
‘남조선?’
‘여기선 도저히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또 공부도 안 되요.’
‘…’
‘남조선에 가서 마음껏 예배도 드리고 공부도 하고 싶어요.’
‘남조선…’
‘네. 어떻게든 갈래요. 거기서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꼭 이에요, 아버지.’
‘… 그래, 그러려무나. 어린 것이 오죽했으면… 그래 너만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만 있다면야…’

탄가루로 까맣게 된 아버지의 얼굴 위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명혁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를 본 것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도.” (「통일과 선교」, pp. 11,12).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순교하신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의 뒤를 이어 죽도록 충성하며 주님과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시다가 평양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이라는 제목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순교 신앙과 어머니의 희생적인 눈물 어린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어머니(유춘택)는 그 누구보다도 저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나는 너 없이는 못 살아” 라는 말을 자주 반복했습니다. “둘째는 십 리 밖에 셋째는 백 리 밖에 두고 살아도, 첫째는 내 옆에 두고 살겠다”라는 말도 자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맏아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감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생적인 눈물 어린 사랑이 평생 저의 가슴에 남아있게 되었고 저를 지탱하는 자양분과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머니와 생 이별을 한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제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1965년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편지를 써서 홍콩을 통해서 북한에 보냈더니, 어머니가 받아보시고 두 달 후에 저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셨습니다.

분명한 어머니의 멋진 필체로 써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받아들고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눈물 어린 사랑이 평생 가슴에 남아있게 되었고 저를 지탱하는 자양분과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부모님과 이별한 후 평생토록 주일 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알고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저의 몸에 심어주신 주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예배 사랑과 기도 사랑의 영적인 유산을 몸에 지니고 실천하면서 한 평생을 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너무 많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풀어 주셨는데 평생 한국과 미국에서 좋은 학교들에게 마음껏 공부도 하게 하셨고, 12년 동안 미국 유학 후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와 선교와 구제와 협력 사역에 종사하게 하셨고 건강도 넉넉하게 주셨고 필요한 물질도 넉넉하게 주셨고 좋은 선배님들과 동역자들과 후배들도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도 주셨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저에게 유익한 보석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요 모두가 아버님의 순교의 은혜이고 어머님의 사랑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과업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넉넉하게 베풀어주신 신앙의 자유와 목회 및 선교 사역의 경험과 축복을 북한 동포들이나 무슬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부족한 저도 저의 아버지처럼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여!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본지 편집고문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123 신앙과 삶

CT YouTube

더보기

에디터 추천기사

한국기독교대학교목회

“종교 문맹 시대, ‘기독교 문해력’ 제안합니다”

2024 한국기독교대학교목회 동계연수회 및 한국대학선교학회(회장 이승문 교수)·한국기독교교양학회(회장 이인경 교수) 공동학술대회가 ‘고전으로서의 성서, 교양으로서의 기독교’라는 주제로 19일 오후 연세대학교 상남경영관에서 개막했다. 이날 행사는 개…

1인 가구

초핵가족화, 5060 고독사, 비혼 출산, AI, 마약…

가정사역단체 하이패밀리(대표 송길원·김향숙)에서 2024년 연말을 맞아 올해 가정 이슈 관련 10대 뉴스를 선정 발표했다. 다음은 구체적 내용. 1. 초핵가족화, 1인 가구 증가 앞당겨져 대한민국은 1인 가구 급증으로 인해 ‘초핵가족화’라는 새로운 가족 구조 변…

김상준

9주년 맞는 ‘원크라이’ 김상준 사무총장 “나라 위한 기도회, 위대한 유산”

‘국가 위한 기도’ 문화 되살려야 그리스도인 최고의 방법은 기도 내년 우크라 인근 방문 기도 예정 원크라이가 2025년 9년째를 맞아 1월 3일 오전 11시부터 평촌 새중앙교회(담임 황덕영 목사)에서 개최될 뿐 아니라, 국내외 집회를 잇따라 열며 지경을 더욱 확대…

탄반연합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5차 기자회견

탄핵반대범국민연합 “계엄, 야당의 폭정과 독재에 대응한 것”

탄핵반대범국민연합(탄반연합)이 18일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4차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정치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도를 강력히 반대하며 헌법재판소에 공정한 판결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에서 탄핵반대범국민연합은 지난 12…

박한수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

“세상은 진리와 거짓의 영적 전쟁터”… 홀리브릿지네트워크, 7천 용사 세운다

3040 목회자 중심으로 리더 양성 성경적 세계관과 창조 질서 수호 사회 변혁할 교회/기관/단체 연합 홀리브릿지네트워크 선교회는 3040세대의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성경적 세계관과 창조질서를 수호할 강한 교회를 세우고, 사회 각 영역에서 변혁을 일으킬 …

서울신학대학교 서울신대 신학전문대학원 제1기 웰다잉 Well-Dying 최고위 과정

“신학대에서 개설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과정”

천국 입학 준비, 잘 안 돼 있어 죽음 생각과 대화 피하는 현실 당하지 않고, 맞이하는 죽음을 국내 신학대 최초로 개설된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원장 하도균 교수) 제1기 기독교 웰다잉(Well-Dying) 최고위 과정 종강예배가 12월 19일 오후 서울 롯데호텔 칼…